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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망원 본문

DAILY LOG

네 번째 망원

KNACKHEE 2016. 7. 22.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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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선택을 강요받아서 진이 빠졌다. 다다음주에나 연락을 줄 것처럼 하던 곳에서 오전 중에 서류를 가지고 올 수 있냐기에 다른 곳에 가기로 했다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알겠다고 하시더니 이내 전화가 와서는 뭘 잘 몰라서 그런 선택을 한 것 같다며, 최종 임원 결재를 올리려는 참인데 복수가 아니라 그쪽 한 명만 올릴 거다, 그리고 우리가 이 계열에서는 나름 대기업이라 월급도 이만-큼 준다, 며 다시 생각을 해 보라고 했다. 솔직히 급여에 좀 흔들려서 엄마한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엄마도 나와 같은 이유로 고민하시다가 그래도 네가 덜 시달리고 더 배울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하시기에 그렇지? 하고는 다시 한 번 감사하지만 먼저 연락 준 곳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래요, 그럼. 잘 지내길 바라요, 라고 말씀해 주셔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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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의 텀을 두고 들어온 물에 좀 더 노를 저을까 해서 일단은 가겠다고 했다가, 굳이, 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루의 텀을 두고 못 갈 것 같다는 연락을 했다. 그리고는 K씨와 B를 만나러 또 망원에 갔다. 망원 지박령인 줄. 후보로 꼽아 두었던 카페 두 곳 모두 만석이었고 심지어 공간도 생각보다 별로였다. 더워서 더는 어딜 갈 수 없어! 마음속으로 외치고는 착착착 걸어서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2층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것 같은 카페는 주인 언니도 예쁘고 카페의 분위기도 부드럽고 아늑해서 무척 좋았다. 럭키. 주문한 당근 케이크가 너무 안 나와서 당근 케이크를 만들어 주나봐, 하고 농을 던졌는데, 내려가 보니 정말 만들어서 막 컷팅을 하려는 참이었다. 소름. 그런데 그 당근 케이크의 맛은 여태 먹은 당근 케이크 중 최고였다. 또 럭키. B가 색종이를 가져와 딸기 접기와 장미 접기를 가르쳐줬다. 마지막 장미가 좀 난관이어서 B랑 둘이 붙어서 끙끙대다, 결국 B가 감을 잡고 해냈다. K씨는 하트 반지를 예쁘게 접어서 B에게 프러포즈를 했는데, 심지어 카페 이름이 부부(bubu)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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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서 아까 완성하지 못한 장미가 못내 아쉬워 편지지를 잘라 다시 한 번 시도했다. 감이 잡혀서 척척 잘 만들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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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조각난 경력이라는 함정이 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포트폴리오도 생겼고 경험치도 좀 더 쌓여서 이전보다 여건이 좋아졌는데도 그 어느 때보다 취직이 힘들었다. 이번 공백기를 가지면서 내가 그동안 내게 주어진 직장에 대해 감사한 적이 없고, 그 이유는 직장을 얻은 게 다 내 잘남인 줄 알았던 오만 탓이었음을 깨달았다. 글에 대한 달란트가 원래 내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신 거라는 것에서 다시 출발해야 했다. 원래 내것이 아니었기에 주어진 직장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밖에 없어야 하는 것이었다. 또 그 이전까지 비전을 주세요, 라는 막연한 기도만 했을 뿐, 직장을 두고 구체적인 기도를 한 적이 없음도 깨달았다. 구체적인 기도가 필요했다. 지금의 이 마음들이 희석되지 않게 잘 기억해 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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