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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LOG

나는 진심을 믿지 않는다

KNACKHEE 2017. 10. 18. 21:50
그녀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진심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됐다.

그녀는 점심 약속이 있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럼 티타임을 갖자고 했다. 점심 한 시간 전에 굳이 불러내서는 운을 뗐다.

내가 두 번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냥 넘겼는데 세 번이 되니까 얘기를 해야겠다 싶더라고. 나도 사람인지라 속상해. 회사 사람들이 네가 그만 두는 거 다 알고 있어. 그리고 왜 그만두고 팀 내에서 어떤 고충이 있었는지도 다 알아. 나는 너를 믿어서 네가 말 안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고 그나마 말한 몇몇도 여기서 버텨 볼려고 얘기를 했던 거예요.

난 널 혼내려는 게 아니야. 사과하려는 거야. 네가 날 믿고 의지하지 못하고 다른 팀하고 얘기하게 해서. 나는 내가 팀장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인가 이 회사를 나가야 하는가까지 고민했어. 요즘 나 되게 의욕이 없어.

(자격 충분히 없고 네가 나가야 모두가 평화로워질 테다.)

그런데 네가 믿고 얘기한 그 애들도 자기 팀 상사한테 보고할 의무가 없지 않아. 말들이 자꾸 커져서 지금 얘기가 이상하게 돌고 있어. 그래도 네가 내 얘길 듣고 네 주변 사람들한테 누가 얘기했는지 묻고 다니진 않았으면 좋겠어.

(말이 돈다 해도 사실이 돌았을 테다. 당신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내 주변인들을 믿지 말란 식으로 몰아간 것도 짜증이 났다. 다 당신 같지 않다.)

사람들이 나보고 왜 맨날 너만 찾더니 왜 잘 못해줬냐고 뭐라고 해. 그 소리 엄청 듣고 있어. 네가 쉐어하우스 알아본다고 할 때부터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대표님께 빨리 인정 받고 싶어서 너네 다 지쳐 있는 줄도 모르고 달리기만 했어.

(거짓이다. 나는 지난 4월 분명 관련 이유로 퇴사 의사를 밝힌 적이 있다. 개선해주겠다고 했으나 지난 주 야근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아무 것도 나아진 게 없었다. 다른 팀 사람들이 나서서 우리의 건강과 출퇴근을 걱정하는 사이에도 그녀는 우리에게 자신의 피로회복제 심부름을 시키고 화장품 심부름을 시키고 얼굴에 주사를 맞고 다녔다.)

이녀는 그렇게 하고 나가긴 했어도 이녀 나가는 건 딱 두 사람만 알고 있었대. 나한테 그러더라고. 그게 팀장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고. 자기 경력자라고.

(아니, 이녀는 당신 엿 먹이기에 혈안이 돼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리 없다. 이런 자리에서조차 거짓을 만들어내며 내가 죄책감을 갖길 바란다는 데 정말 화가 났다. 사과를 하든 디스를 하든 하나만 했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에 대한 거 우리 팀에 대한 거 다른 팀에 더는 말 안 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걸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어서 미안해. 내가 노력할게.

(분명 부장님이 어제 그녀가 없을 때 우리 팀 모두를 소환하려 했다는 걸 듣고 이러는 것이었을 테다. 부장님께 뭔갈 말할까봐. 그만큼 떳떳하지 못하니까.)

더는 할 말도 없어요, 저는. 뭘 더 말하지 말라고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네가 앞으로도 한 달 정도 더 다닐 텐데 그 사이에 또 안 좋은 것들이 생길 수도 있잖아. 그러면 다른 팀하고 의논하지 말고 나랑 하자고. 내가 노력할게. 그리고 너한테 내 오른팔이라고 하고 너 믿는다고 했던 거 다 진심이었어.

(역시 거짓이다. 오른팔은 진심일지 모른다. 그녀가 얘기하는 오른팔은 대왕 호구란 뜻이니까. 믿었다는 건 거짓이다. 그녀는 모든 순간 날 믿지 못해 떠보기 일쑤였다.)

팀을 운영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우리 회사에 다섯 가지 큰 이슈가 있는데 지금 우리 팀 두 명 나가는 게 세 번째로 큰 이슈야. 다른 팀도 이번달 말에 두 명이 나가는데 걔네는 있는 내내 시끄럽다가 나갈 때는 조용하잖아. 우리 팀 애들은 내내 조용히 있다가 나갈 때 시끄러워지니까 다들 재미있어 하고 있어. 더는 도마 위에 오르지 말자.

(이게 왜 재미있냐면 지렁이가 밟히다 밟히다 못해 꿈틀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에 대한 의심이 우리로 인해 구체화되는 듯하기 때문이다.)

/

이 대화를 끝내고 나는 아주 기분이 나빠졌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추악할 수 있는 것인가 싶었다. 퇴근즈음엔 더 잘할 테니 팀을 잘 지켜나가잔 카톡이 왔다. 너무 기분이 나빠 숨 쉬기가 어려웠다. 더는 이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누군가는 또 이 지옥에 들어와 자신의 능력과 인성을 의심하며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겠지. 생각만으로도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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