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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KNACKHEE 2018. 8. 4. 23:35


요즘 신이 나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엄마가 그림이나 디자인을 전공했으면 지금 네가 더 행복했을까? 어쨌든 해볼까 해서 학원에 상담 받으러 가기도 했잖아, 하고 물었다. 나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아니, 하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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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번 일기에도 썼던 것 같은데. 초등학생 때까지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화가, 가 되고 싶었다. 중학생이 돼 더 넓은 직업의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론 꿈이 갈대 같았지. 생물 선생님, 외교관, 피디, 그리고 꽤 오랫동안 출판물 기획/편집자가 되고 싶었다가 결국 어설프게나마 잡지사 에디터,라고 불리는 직업을 갖고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직장을 옮겨 다녔다. 중학교 3학년 때 서너 달 동네 미술 학원에 다니긴 했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았으니까. 선생님이 응원해 주기도 했어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진지하게 미술을 해볼까 싶어서 홍대 앞에 미술 학원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아마 상담도 안 받고 들어갔다 그냥 나왔던 것 같다. 학원 입구에는 입시 미술 과제작들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들을 보는 순간 자신이 없어졌다. 할 수 있을까. 지금껏 잘한다고 믿었던 걸 있는 힘껏 했다가 잘하는 게 아니라는 결론이 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다행히 공부를 못하지 않았고. 열심히 하기도 했고. 고등학교 때 집이 아주 망해서 여태 회복되지 않고 있는 걸 보면, 미술을 아예 시작하지 않은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사실 도망친 게 부끄러워서 한동안 열심히 지금 열거한 것 같은 핑계를 찾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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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조금은 잘할 수 있는 걸 즐겁게 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 글 쓰는 것도 좋지만 여태 글 쓰는 건 직업의 일부였기에 써야 하는 것들을 잘 써야만 했다. 며칠 전엔 더 단정한 글을, 연차가 쌓인 만큼 더 나아진 글을 쓰고 싶어서 글쓰기 강좌를 신청했다. 사회 생활 시작과 동시에 매달 열몇 편의 글을 쓰고 만지다가 직전 회사에서 그 텀이 길어지는 바람에, 지금 이 시기를 활용해서 다시 글을 쓰는 근육을 붙여야지 싶었다. 다음 직장이 어디가 될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길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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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내가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리고 싶은 때에 그리고 싶은 만큼만 그릴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는 말을 쓸데없이 길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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