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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내가 있었다, 열심히 걷기만 하는

KNACKHEE 2018. 10. 30. 22:50

아홉수를 앞두고 백수가 돼 떠나는 동유럽 여행_05


십여  동안 알폰스 무하 뮤지엄 근처를 서성였다. 조금 넉넉하고 조금 성급하게 걸어서. 해가 어렴풋이  오전의 공기에선 생수의 비릿한 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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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의 이미지로 익숙한 그림들을 원화 크기로, 그런 미신적인 것과 떼어놓고 보니 무척 아름다웠다. 무하에 대해선 공부를 못 했는데, 공부했던 클림트와 같은 시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이해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생겼다. 르네상스의 이성적이고 절제된 기법에 반하는 아르누보 양식은 바로크-로코코 시대의 장식적 화려함을 추구한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러다 왜 아름다운 여자들을 르네상스의 전형인 고딕 양식 창문에 가둬놨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미간을 좁히다 시각의 차원을 바꿔봤다. 2차원이 아닌 3차원으로 그림을 바라보면 아르누보 양식으로 표현된 여인들은 고딕 양식 창문 바깥, 자연 속에 있는 모습이었다. 자유롭게.

보자마자 마음을 사로잡은 건 친숙한 리소 기법 그림이 아닌 캔버스화, <STAR>였다. 보자마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작품 설명을 보지 않아도 그림에 서린 분위기가 읽혔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 양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여자의 표정에는 고단함과 모든 것을 해탈하고 운명에 순응하기로 한 데서 느껴지는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언덕 너머에서 여자를 보고 있는 늑대들은 여자의 머리 위에서 환하게 빛나는 별과 대조되는 분위기를 형성하며 그림에 긴장을 불어넣었다. 영문 해설을 보니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무하가 러시아에서 지낼 때 본 고단하게 지내는 소작농 여인들을 그린 그림이라고. 다른 작품을 보러 갔다가도 몇 번이고 다시 <STAR> 앞에 돌아와 섰다.







오후  투어까지 시간이 남아 카페를 찾았다. 출국 하루 전, 구독하던 브런치의 한 작가가 프라하의 카페 추천 글을 올렸고 '운명이야!' 하며 그 리스트 중 적어도 한 군데는 가 보리라 마음먹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요즘 연남동 인근에 성행하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작고 낮은 공유 테이블들이 불규칙적으로 놓인 스타일의 카페였는데 만원이라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안착한 곳은 초록 문의 'Cafe No. 3'. 이곳에 앉아 무하 뮤지엄에서 산 네 장의 엽서 중 P의 싱그러움을 닮은 초록색의 엽서를 꺼내 이번 여행의 첫 번째 편지를 썼다. 이상하게 체코에선 자꾸 P의 얼굴이 그리웠다.

카푸치노가 담긴, 밑동이 조금 깨진 잔은 수줍고 귀여웠다. 카페를 운영하시는 두 어르신의 패션 감각은 카페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였다. 한 분은 레드 체크 셔츠에 서스펜더를, 한 분은 블루 셔츠에 네이비 슈트 베스트를 갖춰 입으셨다.








구글맵의 예상 소요 시간을 확인하고 십 분 일찍 출발했는데도 자주 멈춰서 사진을 찍으며 가다 보니 팁 투어 모임 시간에 일이 분 정도 늦었다. 건널목 하나를 남겨두고 막판 스퍼트. 예술의 장소로 활용되는 루돌피눔에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가이드는 체코의 국명이 바뀐 시기를 중점으로 전체적인 체코의 역사를 훑고, 이동하며 각 스팟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앱을 통해 신청하는 팁 투어와 달리 오늘 합류한 'RuExp Praha' 팁 투어에는 예약 절차도 정해진 금액도 없었다. 오전/오후로 나눠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맞춰 합류하고 투어 말미에 자신이 느낀 가치만큼의 금액을 내는 방식이었다. 설명이 더는 필요 없다고 느껴지면 이동 중간에 이탈해도 무방한, 자유롭고 자발적인 시스템. 가이드의 유머러스하고 깔끔한 설명에, 앱을 기준 삼아 준비한 팁의 금액이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투어가 끝났을 땐 다섯 시에 관람을 마감하는 프라하성 내부에 들어갈 수 없는 시각이었다. 다섯 시 이후엔 황금소로만 무료 개방된다고 해서 우리와 처지가 같은 사람들과 황금소로 입구 앞에 서서 다섯 시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성당마다 역사적 인물의 성체가 있다는 설명을 들은 후라 꺼림칙하기도 해서 안타깝진 않았다. 카프카가 몇 년을 살며 집필 활동을 했다는 그의 여동생 집은 파란 페인트가 칠해진 벽이었다. 그곳의 열악한 주거 환경이 카프카의 건강을 악화시켜 절필로 이어지게 했다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명패 외엔 기념품 숍으로 탈바꿈한 그곳에서 그를 떠올릴 수 있는 연결고리는 희미했다.

도자기로 만든 종, 컵, 주전자, 장식품 등을 파는 가게에서 참지 못하고 작은 노란 종을 샀다. 문에 걸려 있는 리스에도 장식품들이 있었는데, 그중 눈이 처진 노란 병아리가 BTS의 지민을 닮아 그것을 찍는 G의 눈에 사랑스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작고 귀여운 건 언제나 좋고 늘 소중하지.






돌아오는 길엔 숙소 옆 동산에 올라 프라하성 야경을 눈요기 삼아 맥주도 없이 G와 그간 조율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순간들을 이야기했다. 아마 서로 꽤 많은 마음을 보여줬지만 그보다 더 많은 마음을 속으로 삼켰겠지. 서로 다른 걷는 속도와 보행 스타일이 가장 큰 걸림돌인 것 같아서, 어쨌든 목적지는 같으니 각자의 속도로 가서 만나자, 는 거로 일단락했다. 날 두고 가라. 서로를 살피고 미안한 마음에 배려한다고 했던 언행들이 오해의 소지로 작용하기도 했음을 확인하며 인간관계의 난해함을 새삼 다시 느꼈다.

프라하성이 보이는 뷰는 낮에 봐도 밤에 봐도 질리지 않고 은은하게 아름다웠다. G는  투어로 역사를 알고 나니 이제야 프라하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오늘이 마지막 밤이라며 아쉬워했다.

분명 아름다웠고 어떤 풍경은 온종일 앉아서 바라보고 싶기도 했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상하다는 표현도 전혀 적확하지 않은데, 도무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 기분 또는 감정인지 모르겠다. 즉각적으로 보이는, 눈앞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만 있었을 뿐 이를 대하는 나의 마음이나 상념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사색의 시간 없이 너무 열심히 걷기만 했다. 프라하의 곳곳을 껍데기의 내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묻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걸까.


숙소에 돌아왔을 땐 친구와 헝가리로 떠난 S의 엽서가 캐리어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친구가 일상으로 잘 돌아가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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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