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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ERATURE

사랑에 빠졌다, 첫눈에

KNACKHEE 2018. 11. 2. 23:50

아홉수를 앞두고 백수가 돼 떠나는 동유럽 여행_06


지하철 라인에서 기웃대다 분홍색 투피스를 입은 친절한 중년 여성 덕분에 라인을 찾아갈 수 있었다. 라인이 라인보다 더 지하에 있는 건 뜻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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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다 한 민머리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는데, 먼저 어디 가는 길인지 물어왔다. 친절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굳이 거절할 일도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호의를 받았다. 그 아저씨도 지하철의 같은 칸에 탔는데 페이크가 아니라며 짐을 들어주려는가 하면, 안델(Andel)역에 내려서 표지판을 따라가면 레지오젯 버스를 탈 수 있을 거란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고는 곧 다른 승객에게 인사를 건네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체코어로 대화를 나눴다. 체코 친절상은 이분께 드리는 거로.

익히 들었던 대로 레지오젯 버스에 탑승한 2/3는 한국인, 1/3은 중국인이었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동양인에게 인기 만점. 어제 메일로 버스에 스튜어디스가 동승하지 않게 돼 미안하단 연락을 받았는데, 스튜어디스가 어떻게 지나다니지? 싶을 정도로 버스 통로가 좁았다. 대신 좌석은 한국의 그것보다 조금 더 넓고 편했다.









오전엔 날이 흐렸는데 정오를 기점으로 빛이 들기 시작하고 하늘과 지붕의 색이 바뀌었다.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건물들, 그러면서도 러프하게 펼쳐진 산악지대에는 꼭 작고 귀가 뾰족한 요정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도시가 크지 않아 굳이 지도를 보며 루트를 정하지 않아도 두어 시간이면 랜드마크를 모두 둘러볼 수 있었다. 랜드마크 곳곳에서 인생샷을 건지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으리란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분들을 마주했다.




G가 블로깅으로 점찍어 둔 라자냐 맛집으로 안내했고, 블타바강을 바로 옆에 두고 식사할 수 있는 테라스 자리에 앉기 위해 내부의 빈 테이블들을 눈앞에 두고 이십여 분을 기다렸다. 메뉴판을 주고 한참 후에도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아 손을 번쩍 들었더니 아까 오래 기다려야 하니 그냥 내부에 앉으라고 회유했던 웨이터 아저씨가 자신도 번쩍 손을 들어 흔들어줬다. 어쩐지 질 수 없어서 나도 열심히 손을 흔들어 인사를! 그러고도 한참 뒤에 와서는 "우리 모르는 사이인데 인사했네, 한국인이니?" 하고 물었다.

웨이터는 스프라이트를 테이블 위에 놓고 병과 잔에 정확하게 같은 양이 담기도록 따라줬다. 테이블로 쏟아지는 햇볕이 유리잔을 반짝이고 간간이 부는 바람이 테라스 위의 천막을 살랑이게 했다. 펜스 너머로 보이는 블타바강 위에도 햇살이 내려앉았다. 가만히 보다가, 생각했다. 앞으로 봐야 할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위해서라도 죽음이 아닌 삶을 바라야겠다고. 이해인 수녀님의 시 <황홀한 고백>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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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과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어둠속에서도 환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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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체스키에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까지 데려다줄 CK 셔틀 기사님은 무척 스윗했다. 탑승 장소인 광장에 무려 세 대의 CK 셔틀이 있어서 매번 확인증을 들고 뛰어가 탑승 차량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는데, 마지막으로 도착한 차량의 기사님이 내 앞에 분에게는 "Yes, You're mine.", 나한테는 "Yes, I'm your driver." 하고 답했다.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문장이 기사님의 표정 덕분에 달콤하게 느껴졌다. 태도가 만드는 분위기는 무시할 수 없다.

잠이 들어 국경 넘는  보지 못했는데 G의 말로는 검문을 비롯한 아무 절차도 없었다고 한다. 가는 도중 사고 차량이 있어 도로  구간 연기에 휩싸였다. 혼잡했던 도로를 벗어나 어둠이 깔린 도시에 진입했고 예정대로 우리가 묵을 숙소 앞에서 하차했다. 트렁크에서 캐리어까지 내려주는 친절에 흥이 나서 짧은 영어로 "It was nice driving. You're best driver!" 했다. 양손 엄지척과 함께.








신학교 기숙사로 사용됐다던 숙소는 웅장했고 마치 '유적지 안 숙박 체험' 같은 느낌이었다. 정각에 맞춰 종이 울리기도 했다. 고풍스러운 건물 외부와 달리 내부는 엘리베이터도, 자판기도 있는 신식이었다. 침대 위에 놓인 자그마한 웰컴 잼에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귀마개도 있어서 '왜지? 엄청 조용할  같은데?' 하고 갸웃, 했는데 힙한 동네인 건지 자정이 되자 밖이 꽤 소란해졌다.

묀히  전망대로 야경을 보러 갈까, 하고 숙소를 나섰다가 이미 너무 캄캄해진 뒤라 건넜던 다리를 다시 건너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안에 체크인할  보지 못했던 검은 고양이가 있어서 여느 때처럼 "고양이-! 애옹아-!"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무릎을 굽혀 앉자, 고양이가 오른쪽 다리 옆으로 밀착해 지나가며 작게 울었다. 심쿵. 내일은 강행군이란 G의 예고에 샤워 우선권을 넘기고 NTC 앱과 유튜브 요가 동영상으로 내일의 나를 준비했다.


CK 셔틀이 잘츠부르크 시내에 진입한 순간 직감했다. '나는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겠구나.' 겨우 삼십  남짓한  산책이었지만 도시를 가로지르는 잘차흐강을 다리 위로 건너며 확신했다. '나  도시가 좋아.' 사랑은 언제나 갑작스럽고 별다른 이유 없이 찾아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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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