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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ERATURE

천사를 만났다, SUV를 타는

아홉수를 앞두고 백수가 돼 떠나는 동유럽 여행_08


어젯밤, 왼쪽 눈알이 뻐근하더니 아침에 기어이 눈꺼풀이 부었다. 불편해서 신경이 쓰였다. 걱정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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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다짐한 대로 토스터에 식빵을 구워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반숙 달걀도 잊지 않고 껍질을 반만 벗겨 받침대에 올려 숟가락으로 먹었다. 체크아웃 전에 고양이를 한 번 더 볼 수 있었으면 했는데 고양이님은 작별인사를 하러 나타나 주지 않았다.







숙소에서 십오분 정도를 걷자 미라벨 정원이 나타났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인 데다 영화도 보지 않아서 그런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찍었다던 장소에선 별 감흥이 없었다. 잔디를 다듬는 중이라 흙바람이 너무 불기도 했고. 사실 메인 정원도 '와!' 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정갈한 조경을 보며 조경 전문가들의 기획력과 스킬에 감탄했다.






잘츠부르크에서 오버트라운으로 넘어가는 OBB 열차 시간이 11시 10분인  알고 넉넉하게 40분 전에 역으로 갔는데 11시가  되도록 전광판에 우리가 타야  열차 번호가 뜨지 않았다. 다시 예약표를 유심히 보니 11. 10은 시간이 아닌 날짜였고 출발 시각은 13시 12분이었다. G에게 사과하는 수밖에. 미안한 마음에 "에피소드 1을 획득하였습니다!" 하고 시답잖은 농담을 던져보기도 했지만 역시 효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인데 어쩌겠어. 어쩔  없지! 그리고 갑자기 생긴  시간 동안  일을 찾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안에 있는 스타벅스에 앉아 밀린 일기를 썼고, 열심히 썼는데도 시간이 부족했다.

원래 열차 시간에 맞춰 다시 역으로 갔더니 15분 정도 지연됐단 안내가 떴다. 그렇게 되면 환승 기차를 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해결책도 없이 열차를 지연시켰을 리는 없지. 인포 데스크에 물어보니 원래 타려던 것보다 1시간 뒤에 있는 열차를 타면 된다고 했다. 덕분에 환승역인 Attnang Puchheim에서 40여 분의 여유가 생겼고, 무하 뮤지엄에서 산 엽서에 두 번째 편지를 썼다. 회사에서 언제나 기꺼이 즐거운 피사체가 돼 줬던, 사흘 뒤에 웨딩드레스를 입는 Y에게. 여행 시기와 맞물려 Y의 결혼식에 가지 못하게 된 건 정말이지 두고두고 속상하다.








오버트라운은 정말 작은 역이었고 숙소까지는 20여 분을 걸어야 했다. 원래도 걸음이 빠른 G는 열차 지연과 환승 시간 변경에 마음이 조급했는지 저 앞에서 점이 되어 사라졌다. 2AM의 금지 영상이 생각났다. 내가 잘 잘 잘못했어, ... 예약한 숙소는 동화에 나올 법한 숲속 마을 느낌의 부지에 있었고 캠핑 트레일러가 무려, 마차 모양이었다. 호수가 캠핑 사이트 바로 옆에 있었는데 비가 많이 와서 넘치면 무사할 수 없겠단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멋진 가죽 부츠를 신은 사장님은 무척 친절했고 침구가 프랑스산 실크라며 자부심을 내비쳤다. 할슈타트에 갈 거라고 하니 그곳에서 가지 말아야 할 식당을 본인이 직접 제작한 듯한 지도에 표시해 주기도 했는데 지도를 놓고 오는 바람에 'X' 표시가 있는 곳 중 하나에서 저녁을 먹었다. 겨우 8시였는데 문을 연 곳을 찾기가 어려워 선택지가 거의 없기도 했고. 그렇지만 사장님의 견해와 달리 음식은 무척 맛있었다. 특히 오리 가슴살이!

버스 시간이 애매해 할슈타트를 내일 가야 하나 지금 빨리 다녀오는  나은가 갈팡질팡하다가 내일 캐리어를 끌고 움직일 자신이 없어서 빠르게  보기로 했다. 구글 지도에 표시된 버스 정류장 위치가 애매해 확신이 서지 않는 자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우리 앞에 SUV  대가 멈춰 섰다. 차창 너머로 하이디 옷을 입은 언니가 보였고 우리에게 할슈타트에 가는 것인지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뒤에 짐들은 신경 쓰지 말고 타!" 했다. 뜻밖의 히치하이크. 에인절님! 고마워서, 짧은 영어로 열심히 대화를 시도했다. 자신은 오버트라운에 사는데 할슈타트에 일하러 가는 길이라며 최근 할슈타트 인근 산에서 불이 났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원인을 물으니 정확히는 모르지만 담뱃불 같은  아닐까, 하기에 동유럽 어느 곳에서나 마주쳤던 길빵족들이 떠올랐다.

할슈타트는 아주 작고 아기자기했다. 유람선을 타지 않으면 딱히   없는 곳인  같아서 조금 촉박하게라도 오늘 다녀온  좋은 선택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빠듯하게 막차 시간에 맞췄는데 기사 아저씨가   값을  건지   값을  건지 묻는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버스비가 얼마인지 물었더니 요금통을 탕, 치면서 "Two or one!" 하고 화를  기가 죽었다. 쭈굴. 원이요, 원.




버스에서 내려서 숙소로 걸어가는   남짓한 시간 동안 인생에서    가장 크고 밝게 빛나는, 가장 많은 별을 봤다. '쏟아질  무수히 많은 별'은 이런 하늘을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가로등조차 없는 유럽 시골의 밤하늘이란. G는 숙소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별을 보러 나갔는데(나중에 이날 별똥별도 봤다고 해서 살짝 동공이 흔들렸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나는 숙소에 남았다. 벌레 핑계를 댔지만 인생에서 꼽을 만한 그런 멋진 별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들이랑 보고 싶어서. 지난주, 직전 회사를 비슷한 시기에 퇴사한 동료들과 롯데월드에 갔다. H가 "우리 너무 좋다. 그래서 여행은 언제 간다고요?" 하는 말을 덥석 물어 "별 보러 가요, 우리!" 했다. 지나가는 말로 듣고 대답해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린 5년 안에 별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게 가장 강렬한 처음이었으면 해서. 좋을  분명할 오늘의 밤하늘을 짐짓, 모른 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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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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