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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ERATURE

따사로운 장면을 봤다, 길가에 놓인

KNACKHEE 2018. 11. 7. 00:20

아홉수를 앞두고 백수가 돼 떠나는 동유럽 여행_09


프라하에선 새벽   반을 시작으로 매일  시간씩 기상 시간을 늦춰가더니 잘츠부르크에서부터는 알람 없는 여섯   기상으로 시차 적응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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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같았으면 일어나자마자 양치와 세면을 했을 텐데 다 미뤄두고 잠옷 위에 재킷을 걸친 채 밖으로 나갔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고 투명한 남색의 수면 위로 산이 비쳐 흔들렸다. 간간이 새의 소리만 있을 뿐, 사위는 아주 고요했다. 어제 캠핑 부지와 맞닿는 곳의 호수 깊이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사방이 어둠이고 산이 비치니 수심이 아주 깊은  같은 느낌이 들어 걸음을 조심하게 됐다. 해가 뜨고 보니 캠핑 부지와 맞닿는 부분은 닥터마틴의 굽이  잠기지도 않을 만큼 얕았다. 넋을 놓고 보다가, 감탄하다가, 사진 찍다가, 영상도 찍어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G를 불러왔다. 혼자   없는 풍경이었다.

해가 뜨면서는 산봉우리부터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수면에 비친  모습은   윗부분이 불타는 것만 같았다. 같은 장면의 사진을 시간이 흐르는 대로 계속해서 찍었다. 어쩜 질리지도 않고  시각 경이로운지.









G가 귀여운 원피스를 입었기에 캠핑장 곳곳의 포토 스팟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나는 스냅 사진사처럼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옆으로  줘!" "고개는 살짝 내리시고여-" "마차 주인인 것처럼  주세여-" 사실 여기서 입으려고 이  정도 원피스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지냈다. 하지만 원피스는     직장 상사의 반강요로 구매했던  마지막이었던 내게 그건 오프라인으로도, 온라인으로도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인근 쇼핑 랜드마크  군데를 돌고 자주 이용하는 온라인 편집숍의 원피스 카테고리를 끝까지 탐색한 후에는 현타가 와서 'TPO 모르겠고, 취향대로 입을 테다.' 하는 마음으로 스트라이프 셔츠  장을 사서 캐리어에 넣었다.

캠핑장 사장님은 끝까지 친절했다. 열차 시간을 묻더니 해당 시간표를 인쇄해주고 이건 비행기가 아니니 가격이 같으면 다른 시간대의 열차를 타도된다며 빠른 시간대의 열차도 알려줬다. 잘츠부르크에서 오버트라운으로   검표를  해서  시간을 기다리느니 일찍 가볼까, 하다 환승 열차 시간이 애매해 그냥 근처에서 점심을 먹으며 노닥거리기로 했다.  결정이 다행이었던 게, 오버트라운에서 빈으로  때는 검표를 하더라고. 가뜩이나 영어도 짧은데 복잡해질 뻔했다.











어제 오버트라운역에서 숙소로 오는 길 일부가 돌길이라 힘들었던 게 생각나 숙소에서 역으로 갈 때는 그 길을 피해 조금 돌아갔다. 덕분에 따사로운 장면들을 많이 만났고 걸음 수만큼 사진을 찍느라 시간이 너무 많이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은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오버트라운에는 겨우 만 하루를 머물렀을 뿐인데 어느 곳에서보다 많은 사진을 찍었다. 역시, 광활한 자연이 최고.

역을 조금 지나, '한국을 사랑합니다' 라는 선간판이 세워진, 이탈리아인이 하는 피자 가게에 가서 구글맵 리뷰어들의 추천대로 매콤한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와 하와이안 피자를 먹었다. 리뷰어들의 평은 꽤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




환승 열차를 타자마자 여덟 살 남짓으로 보이는 남자애 세 명이 "알로." 하더니 이내 크레이지 어쩌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웃길래 "You are so rude." 하고 예매한 자리를 찾아갔다. 뒤에서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는데 어차피 나는 못 알아들으니까.

빈에 도착했을 땐 늦은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OBB 열차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오자마자 고층의 OBB 빌딩이 있어서 "와, 도시!" 했다. 오버트라운에서 빈으로 가는 열차 안에선 세 번째 엽서들을 썼다. 오랜 텀을 두고 봐도 어색하지 않고 대학 때부터 봐왔지만 여전히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 M과 오래오래 질척이면서 조금씩 많이 알아가고 싶은 밝고 사랑스러운 W와 세상 귀여운 H에게. 마치 엽서들에 여행에서 얻은 마음들을 조각 내 담는 기분이었다.

숙소는 역에서 오 분도 채 안 되는 최적의 거리에 있었고 호텔인 만큼, 쾌적했다. TV도 있었는데 재미있는 채널은 하나도 없었다. '심슨'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오늘의 저녁과 내일의 아침 요깃거리를 사러 마트에 다녀온 사이에 끝나버렸다. 내일은 강행군이 예상되니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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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