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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ERATURE

안도했다, 다른 삶을 기대할 수 있어서

아홉수를 앞두고 백수가 돼 떠나는 동유럽 여행_13



중앙시장에 다시 방문했다. 어제 봐둔 원석 팔찌로 G와 이번 여행의 우정 아이템을 맞춰볼 심산이었는데, 결과는 대실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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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얼핏 봤을 땐 반짝반짝 빛이 났는데 막상 사려고 보니 썩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지하에 있는 마트에서 초콜릿만 잔뜩 샀네. 계획했던 소비가 아니라 봉투를 가져가지 않았고 또 사기도 애매해서 마트 전단으로 고기 싸듯 초콜릿들을 감쌌다. 그러고는 다시 중앙시장 이 층을 돌아다니다가 동생에게 줄 작은 유리컵을 하나 샀는데, 사장님이 네 손에 든 게 크니까 이렇게 하면 더 좋을 것 같아, 라며 초콜릿이 들어갈 만큼의 큰 봉투에 유리컵을 담아줬다. 아름다운 세상.

숙소로 가는 길에 조심스레 G에게 어제의 팔찌 구매를 고백하며 한번 가서 보고 괜찮으면 그걸로 우정 아이템을 맞추자고 제안했다. G는 작은 원에 병아리가 찍힌 팔찌를 샀다.














낮에 타는 유람선도 좋았다. 빛은 언제나 실패하지 않지. 반짝이는 강을 보는 건 늘 좋다. 곳곳에 물든 가을의 색들도 귀여운 사람들의 움직임도 잔뜩 볼 수 있었다. 체코의 건물들은 파스텔 색과 원색이 섞인 알록달록한 옷을, 오스트리아의 건물들은 대체로 모노 톤의 옷을 입고 있었다. 헝가리의 건물들은 체코 쪽에 가까웠는데 원색이 아니라 브릭, 와인 같이 딥하고 명도가 높은 색이라 사뭇 다른 느낌을 줬다.







바닐라-시나몬-오레오 순으로 꽃잎을 만든 장미 아이스크림은 먹자마자 같은 조합으로 하나를 더 먹고 싶을 만큼의 맛있음이었다. 여행의 마지막은 여유롭게 보내고 싶어서 저녁 전까지 카페에나 가 있겠다고 했더니 뜻밖에 G도 동행하겠다고 했다. 가는 길에 자라에 들러 체코에서 봤던 레드 타탄체크 코트를  한번 더 입어보고 두 번째 이별을 맞았다. 아녕, ... ★ 계속 생각날 거야. 하지만 잊기 어려운 사랑을 보내줬으니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겠지!

조명이 예뻐서 눈여겨 봐뒀던 숙소 근처 카페 'SuWu'. 조명도 조명이지만 전체적으로 라이트 톤의 나무 인테리어에 노랑을 포인트 색으로 쓰고 있어서 아늑하면서도 발랄한 느낌을 줬다. 심지어 직원은 노랑 니트에 블랙에 가까운 딥 와인 컬러 립스틱을 매치했다. 언니 너무 예뻐요, 흑흑. 그런데 왜인지 카페의 브라운관에선 계속해서 빅토리아 시크릿 런웨이 영상이 나왔다. 조명과 나무와 노랑과 빅토리아 시크릿이라니. 콘셉트 무엇? 이곳에서 일기의 진도가 드디어 헝가리에 진입했다.

어제 제대로 보지 못한 시집도 조금 더 읽었다. 심보선 시인의 <지금 여기>라는 시에 마음을 붙잡혀서 몇 번을 다시 읽고 노트에도 옮겨 적었다. 무無에서 무無로 가는 인생의 간이역에 잠시 머무는 이유는 나와 네가 만나 사랑함으로 광활한 별자리를 짓기 위함이라는. 사는 거 별거 없지. 사랑보다 중요한 건 없다.




저녁을 먹기 전에 남은 포린트를 처리하려 마트에 갔다. '뜨거운 생활'이란 이름의 잡담회를 이 년째 함께 해오고 있는 두 동기에게 줄, 잔뜩 외국스러운 초콜릿을 샀다. 그러고도 초콜릿을 세 개는 더 살 수 있는 돈이 남아 다른 마트에 들렀다가 나이든 계산원의 절제된 친절에 감탄했다.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선을 지켜주는 무뚝뚝한 다정함.

숙소에서 가깝단 이유만으로 저녁을 먹으러 간 햄버거 가게는 예상치 못하게 최첨단이었다. 테이블마다 의자 개수대로 모니터가 있고 착석하면 직원이 중앙 제어로 액정을 켜줬다. 테이블 아래 터치 패가 있고, 온라인 쇼핑을 하듯 먹고 싶은 메뉴를 장바구니에 담으면 자동으로 주문이 들어가는 시스템이었다. 식사 도중의 추가 주문도 자유로웠다. 처음부터 핸드폰과 연동해서 계산할 수도 있고 매장에서 직원을 통해 계산하는 것도 가능했다. 각자 계산과 테이블 전체 계산 옵션도 있었다. 헝가리는 IT 선진국이었어! G는 계속해서 이 시스템을 사업 아이템으로 탐냈다. 헝가리 소비 1위라는 맥주도 주문했는데 그동안 마신 것들처럼 탄산이 적어 목넘김이 부드럽고 고소했다. 유럽에서의 맥주는 실패하지 않는구나.







G가 야경을 본다기에 슬렁슬렁 강가 산책이나 하는 줄 알고 따라나섰다가 걸어서 삼십여 분이 걸리는 어부의 요새에까지 올라갔다. 여행 마지막 날까지 땀을 흘리게 될 줄이야. 그런데 어부의 요새에 올라가서 본 야경보다 돌아오는 길에 세체니 다리 위에서 본 야경이 더 좋았다. 야경은 안전한 느낌을 준다. 불빛의 색도, 늦은 시간에 많은 사람 속에 섞일 수 있는 것도. 자연의 빛이든 인간이 만들어 낸 빛이든, 빛은 언제나 마음을 채운다. 물론, 홀로 빛나려 기를 쓰는 빛은 말고.

체코에서는 왜인지 마음이 계속 번잡해서 그러지 못했는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선 일상이 만들어 내는 풍경들을 눈에 담으려 노력했다. 이번 여행으로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지반이 조금은 넓어진 느낌이다.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의 아웅다웅이 전부가 아니라는 위안. 다른 삶을 기대할 수 있다는 안도.

QT 책을 챙겨온 것도 다행이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인 오늘, 베드로전서 본문이 끝났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다. 그 은혜 아래 있는 내가 할 일은,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그분을 본받는 삶을 살려 노력하는 것. 그리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을 끌어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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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연히 삶을 방문했다 / 죽으면 나는 개의 형제로 돌아갈 것이다 / 영혼도 양심도 없이 / 짖기를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네발짐승의 곁으로 /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 / 인간 형제들과 함께 있다 / 기분 좋은 일은 / 수천수만 개의 따뜻한 맨발들로 이루어진 / 삶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을 때에 / 나의 눈동자에 쿵쿵쿵 / 혈색 선명한 발자국들이 찍힌다는 사실 / 나는 왔다 / 태어나기 전부터 들려온 / 기침 소리와 기타 소리를 따라 / 환한 오후에 심장을 별처럼 달고 다닌다는 / 인간에게로, 그런데 / 여기서 잠깐 질문을 던져보자 / 두 개의 심장을 최단거리로 잇는 것은? / 직선? 아니다! / 인간과 인간은 도리 없이 / 도리 없이 끌어안는다 / 사랑의 수학은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 우주에서 배꼽으로 옮겨온다 / 한 가슴에 두 개의 심장을 잉태한다 / 두 개의 별로 광활한 별자리를 잇는다 / 신은 얼마나 많은 도형들을 이어 붙여 / 인간의 영혼을 만들었는지! / 그리하여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 인간이기 위하여 / 사랑하기 위하여 / 無에서 無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 초라한 간이역에 아주 잠깐 머물기 위하여

- 심보선 <지금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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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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