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 죽음 ; 빛나는 본성


피크닉piknic의 새로운 전시의 주제는 '명상'이었다. 첫 전시였던 <류이치 사카모토> 전 이후 거의 2년 만의 방문은 코비드19로 인해 원하는 시간대의 티켓을 예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첫 번째 전시물은 모래 바닥에 비춰지는 영상이었다. 차웨이 차이 작가의 영상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었지만 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기독교이기에 이를 보면서 거듭남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 중간계에서 들리는 인간이 아닌 것의 메시지를 보며 든 생각인 것 같은데, 삶에서 중요한 건 세속적인 성취가 아니라 자신의 안에 있는 본질인 '빛나는 본성'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맥락에서 거듭남을 떠올렸던 것 같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즉 그분의 성품을 닮은 존재이기에 자신의 안에 있는 본성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믿음과 순종을 뜻한다. 거듭남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이러한 삶을 결심한 상태인 거고. 그렇게 영상에서 건져올린 '빛나는 본성'이라는 단어를 손에 쥐고 다음 전시실로 이동했다.
미야지마 타츠오 작가의 시간의 상대성을 다룬 작품은 재작년 연말에 봤던 아몬드 대런 작가의 전시를 떠올리게 했다. 바닥에 놓인 다섯 개의 대양과 각자의 시간은 시국과 맞물려 사망/감염자의 집계 수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층을 올라가 마주한 박서보 작가의 작품은 원 오브 제로 작가의 공간 디자인이 더해져 붉고 강렬한 고통들을 지나 신을 만나러 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한쪽 벽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작품을 보면서는 작품의 크기가 불러일으키는 경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한 층을 더 올라가니 자오싱 아서 리우 작가가 순례길을 담은 영상 작품이 있었는데, 티베트의 문화를 너무 몰라서 저들이 어떤 마음으로 신을 향해 가며 고행을 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내게는 수행의 고통을 보는 불편함만 남았다.
오마 스페이스는 체험형 전시 공간이었는데 솔직히 초반에는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중간은 꼭 거듭남의 지점 같았는데 이후 펼쳐진 푹신한 길에서도 이전의 길의 찌끄레기들이 남아 발바닥에 밟혔다. 꼭 단번에 죄를 끊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플라스티크 판타스티크의 공간은 숨쉬는 벽이 유발하는 갇힘이 너무 무서워서 길이 열리자마자 후다닥 공간의 끝을 향해 달렸다. 마지막 데이빗 린치의 영상에서 'PEACE TO ALL OF YOU,'를 듣고 나오는 바닥에는 이런 맥락의 글이 있었다. "우리 뒤에 있는 것들과 / 우리 앞에 있는 것들은 / 우리 안에 있는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전시의 시작이었던 영상에서 '빛나는 본성'을 언급했던 게 떠올랐다. 와. 나 이 전시 또 가고 싶어. 아. 패브리커가 구축한 명상의 공간도 있었는데 2분은 나의 안을 들여다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명상의 공간에서는 각 전시장들이 명상 체험으로 가기까지의 지연 장치였던 것 같다, 고 지난 수업에서 서사의 지연 장치에 대해 배운 것을 적용해보며 혼자 즐거워했다.


왜인지 전시실을 이동하면서는 타인에 대한 내 관심의 주류를 이뤘던 건 질투와 부러움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에서 덕메에게 이 일과 일전의 수치란 감정에 대해 자각하게 된 얘길 하면서 이젠 그랬던 대상들이 더는 궁금하지 않다고 말했다. 일단 지금은. 덕메는 지금은 그 감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으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 거라고, 자신의 경험에 비춰보면 그렇다며 격려해줬다. 카페에 들르기 전에 피자를 먹으며 마신 겨울의 이름이 들어간 맥주는 겨울 초입의 바람이 떠오르는 맛이었다. 스토리에 자랑하고 싶었는데 가을 초입의 바람이 떠오르는 맛이라고 잘못 적어서 삭제하고 다시 올리지 않았다. 겨울 초입보다는 가을 초입이 익숙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겨울의 이름을 달고 있기에 애써 겨울과 연관지으려 했지만 실은 마음속에서는 가을의 그것과 더 닮은 맛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알 수 없네.

밝게 빛나는 달과 별을 볼 때면 더 좋을 나중을 위해 그때의 별보기를 모른 척했던 오버트라운에서의 밤이 생각난다. 지금은 그들과 별을 보러 가는 일이 아주 묘연해졌고, 나는 이제 와서 그때의 기회가 아쉽다. 그래도 그때 좋은 마음이었으니 괜찮은 걸까. 모르겠다. /과정이 좋은 꿈을 꾸면 괜찮을까. 과정이 좋은 꿈이라면 꿈에서 깨어나도 슬프지 않을까./ 6년 전의 나는 이런 맥락의 무언가를 썼다. 요즘도 자주 이것을 자문하고 답은 여전히 미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