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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마쓰에 갔다, 우동을 먹으러

KNACKHEE 2019. 4. 3. 23:39

십 년 차 친구 이 센세와 떠나는 첫 해외여행, 다카마쓰_01

 

 

출국 이틀 전에서야 모네의 그림이 있는 나오시마 섬의 지추미술관이 휴관이란 사실을 알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하고 있던 부분이 뒤틀려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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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마쓰 근처 다른 섬들의 정보를 기웃거려 보기도 했지만 딱히 끌리는 곳이 없었다. 1월에 휴관인 지추-이우환 미술관이 클래식한 미술관이라면 휴관이 아닌 베네쎄 뮤지엄, 집 프로젝트 등은 현대 미술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인 것 같았다. 후기가 나쁘지 않아서 일단 가 보기로.

대학교 입학 전 예비 대학에서 만나 여태 친구로 지내는 이 센세와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이기도 하고 둘 다 시간을 많이 내기도 어려워 '일본'을 큰 틀로 두고 세부 목적지를 정했다. 센세가 일본의 소도시를 가고 싶다며 항공권 특가가 뜬 다카마쓰를 제안했고,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다카마쓰행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여행을 앞두고 회사 선배들이 어딜 가느냐고 물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식의 확신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어,... 다카마쓰?" "다카마쓰?" "네, 일본 다카마쓰,..." "거긴 뭐가 유명해요?" "우,... 동?"

예상보다 1월에 프로젝트를 많이 할당받게 돼서 겨우 이틀의 연차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야근도 꽤 잦았고. 계속해서 불타는 식도 상태라 위장약을 달고 살았다. 사실 좀 억울했다. 이틀인데. 겨우 이틀인데. 그걸 내지 말았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어렵다는 게.

 

 

 

이른 8시 30분 비행기라 새벽에 집을 나섰다. 이른 5시는 어슴푸레한 시각이었다. 조금은 더부룩한 마음과 어쨌거나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신남이 섞인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그러고 보니, 회사에 다니며 가는 여행이라 그런지 새로운 곳에 간다는 설렘보다,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 앞섰다.

환승해야 하는 공항행 버스는 만석을 이유로 승차를 거부했고, 세 번째 버스가 왔을 때야 겨우 탈 수 있었다. 방학 때라 공항의 모든 구간에서 줄이 길었다. 나보다 한 시간이나 더 먼저 도착해 도시락 와이파이를 찾고 탑승동으로 이동해 있던 센세를 면세 인도장에서 만났다. 이박 삼 일 내내 볼 얼굴인데도 진심으로, 반가웠다. 그리고 보자마자 말했다. "나 진짜 잠옷 안 챙겨왔어. 그러니까 꼭 가야 해 무인양품."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해가 떠올랐다. 이글이글.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리츠린 공원까지는 리무진 버스로 30분 정도. '소도시'로 불리는 다카마쓰는 날이 아주 쨍하지 않은 탓인지 채도가 낮고, 소란하지 않고, 모든 것이 아담하고 정갈한 느낌이었다. 숙소에 짐을 맡기는데 주인 할머니가 사누키 우동을 먹으러 갈 예정이면 지금은 붐빌 시간이니 리츠린 공원을 먼저 둘러보고 가는 걸 추천한다고 했다. 꾸벅, 감사의 말을 전하고 사누키 우동을 먹으러 갔다. 공원은 내일의 일정이라서.

타이밍이 좋았던 건지 가게 안은 별로 붐비지 않았고 고속도로 휴게소의 뷔페식 식당처럼 튀김, 꼬치 등의 토핑을 원하는 대로 고르고 우동 면의 양과 국물을 곁들이는 방법까지 선택하는 형식이었다. 영어 안내문도 없어서 눈치껏 줄을 서서 다카마쓰 쿠폰북과 함께 보내준 안내 책자에서 본 우동의 종류에 관한 설명을 떠올리며 국물이 있는 우동을 주문했다. 일본에서의 첫 끼를 먹다 말고 이 센세는 말했다. "매운 거 먹고 싶어."

 

 

 

기타하마 앨리에 가려면 전철을 타야 해서 천천히 리츠린 공원 역까지 걸었다. 길엔 사람이 아주 드문드문 있었고 한때 아이돌들 뮤비에 자주 등장했던, 아기자기하고 아주 일본스러운 느낌의 좁은 길들이 펼쳐졌다. 기찻길 건널목 앞에선 기차가 오지 않아도 모두가 잠시 멈췄다 출발하는 약속을 지켰다. 생경한 광경이라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구경했다.

기타하마 앨리는 성수동의 대림창고 같은 느낌이었고 특색이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비슷한 것을 파는 가게 몇 군데를 둘러본 후 카페 유미에를 찾아갔다. 가는 길목에는 연희동으로 이사하기 전 유어 마인드와 같은 느낌의 작은 독립 출판물 서점이 있었다. 사고 싶었던 마리아 스바르보바의 사진집을 만지작거리며 센세에게 "아- 어떡하지 진짜. 사고 싶었던 거긴 한데 지금 사기엔 가격도 좀 있고 일본어고 남은 종일 들고 다녀야 하는데,..." 하고 건네는 말을 빙자한 혼잣말을 했다.

마스크를 쓰고 카운터에 앉아 있던 귀여운 여자애가 다가오더니 책 한 권을 집어들며 이 서점에서 출간한 거라고 했다. 한국말로. 친절에 응해 책을 뒤적였는데 주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서브젝트? 띰?" 등의 단어를 동원해 주제를 물었으나 소통이 되지 않았고 여자애가 번역 앱을 내밀었다. 주제, 하고 입력하자 "아, 데므!" 하더니 책의 제목을 번역기에 써줬다. 아무도 보지 않는 춤을 추자, 정도의 제목이었다. 최소한의 정보를 알고 나니 사진들을 더 가까운 마음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곧 신촌과 이대 쪽에 방문할 예정이라며 음식점을 추천해 달라기에 나도 가봐야지, 하고 저장해뒀던 신촌의 라구식당을 알려줬다. 부디 여행에서 괜찮은 기억을 남기는 곳이 되길. 무엇이라도 사서 나오고 싶었는데 여의치가 않아서 손님이 몰린 틈을 타 옆의 카페로 넘어갔다.

 

 

 

카페 유미에는 식사 메뉴도 함께 파는 곳이라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카레 냄새가 진동했다. 바다가 보이는 창 앞에 앉아 곰 라테 아트가 올려진 화이트 카푸치노를 마셨다. 마실수록 컵 위의 곰은 성난 표정이 됐다. 카페엔 사람이 많았는데도 시끄럽지 않았다. 모두가 얘기하고 웃는데 그 어떤 소리도 신경을 곤두서게 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우리도 대화의 데시벨을 조금 낮췄다. 그리고 몇 번이고. 지금 이 시각에 회사에 있지 않아 너무 좋다, 는 소회를 밝혔다.

카페인을 충전하고 나오자 바닷바람이 아까보다 차가워져 있었다. 조금 걸어 쇼핑 타운이라는 마루가에마치 그린에 갔는데 평일 낮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명품 숍부터 스파 브랜드, 프랜차이즈 카페 등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었다. 센세의 목표는 다이코쿠 털기, 나의 목표는 지인들 선물과 무인양품 잠옷 사기였다.

특히 무인양품의 밝은 회색 잠옷을 사고 싶었는데 막상 대보니 차콜이 좀 더 나았다. 여자 잠옷이 남자 잠옷보다 2000엔이나 더 저렴해서 오버사이즈 핏을 포기하고 여성용을 사려고 보니 차콜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색은 같아도 재질이 다르니까! 라며 재작년에 이어 또 남색 잠옷을 샀다. 어쨌거나 잘 때 입을 옷을 해결했다는 자체로 마음이 편해졌다. 다이코쿠에서는 과자 몇몇개를 바구니에 넣었다가 굳이, 하는 생각이 들어 모두 내려놓았다. 중학생 때만 해도 일본 과자들을 직구해서 먹었는데 지금은 너무 많은 것들이 한국에 들어와 있어서 꼭 여기서 사야 할 메리트를 느끼지 못했다. 가격이 아주 저렴한 것도 아니었고.

요즘의 나는 늘 스파게티가 먹고 싶은 상태라 고민 없이 저녁 메뉴를 골랐다. 센세는 직원이 손님을 대하는 타이밍을 관찰해 알려줬다. 손님이 가게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짐 정리를 끝낸 후에야 물잔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점원이 손님의 테이블로 향한다는 거였다. 저런 섬세한 친절이라니.

식사 후엔 식당 맞은 편의 서점에 갔는데 여러 코너에 고루 사람이 많았다. 소설과 만화 중 많은 것들이 드라마 또는 영화로 제작된 것 같았고 잡지 코너가 두 군데나 있을 정도로 잡지가 많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리 잡고 앉아서 판매용 책을 보고 있지 않았다. 감탄과 감동.

 

 

 

온천을 하고는 싶지만 부끄러워서 조금 망설여졌는데 센세가 탕이 여러 개니 서로 다른 탕에 있으면 되지! 라는 현명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역에서 파는 1000엔짜리 부채는 붓쇼잔 온천 1회 입장권과 전철 1일 이용권 역할을 했다.

온천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선 오스트리아, 그러니까 한 계절 전의 여행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관해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여행 중 발생하는 사소한 불만들이 있었지만 아주 행복했다. 덕분에 회사란 공간으로 돌아가도 괜찮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당시엔 스트레스의 주원인이던 회사가 없었고 정말 가고 싶었던 곳에 왔고 눈앞에 놓인 아름다운 장면을 즐기며 준비해온 돈을 쓰기만 하면 됐으니까. 어떻게 보면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대부분의 여행은 그런 조건을 갖춘다. 혹시 행복은 '행복하지 않을 수 없잖아'의 상태인 걸까? 그렇다면 여행에서는 행복해야만 하나?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이 갖춰졌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센세에게 '행복하지 않을 수 없어'의 상태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센세는 그런 조건이 충족됐음에도 아쉬움을 느끼는 건 결국 더 갖고 싶은 욕심 때문이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자신의 경우엔 매해 더 좋은 학생들을 만나고 싶고 경제적으로 더 여유가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고. 행복에 관한 대화는 전철에서 내려 가로등이 거의 없는 밤길을 걸으면서도 계속됐다. 센세는 결국 행복에는 '조건'이 필요한 것 같다며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섬에 떨어진 사람에게 행복한지 물으면 그렇다고 답할 사람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나는 상황과 맥락이라는 반기를 들었고 센세는 그 '맥락' 역시 행복의 또 다른 '조건'이지 않겠느냐는 말로 끝없이 뻗어나가려는 질문을 일단락지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어쨌거나 아쉬움은 늘 있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자신은 지금 행복한 것 같다고.

 

 

 

온천에는 다섯 개의 탕이 있긴 했으나 실내에 있는 두 개의 탕은 냉탕이고 야외의 세 탕은 미지근, 약간 뜨거운, 극단적 뜨거움의 상태여서 실질적으론 하나의 탕이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어느 탕이든 깊지 않아 몸이 다 잠기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뜨뜻미지근한 물속에 몸을 적시고 나오니 아주 노곤해졌다. 뜨거운 탕에도 들어갔던 센세는 동공이 풀려 있었고.

다시 역으로 가는 길에 별 기대 없이 들른 편의점에서 딱 하나 남아 있던 민티아 라임레몬 맛을 득템했다. 낮에 쇼핑 거리에서 편의점이나 그런 류를 파는 곳이 보이는 족족 들어갔었는데 라임레몬 맛은 구경도 하지 못한 터였다. 마치 용볼을 모으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실패. 한국에 돌아가 구매 금액만큼의 배송료를 내고 직구를 하는 쪽으로 체념했다.

 

 

 

숙소 근처엔 편의점이 없었던 것 같아서 리츠린 공원 역 근처의 로손 편의점을 지도 앱에 의지해 찾아갔다. 편의점에 가는 길은 아주 캄캄했고 별은 아주 반짝였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만난 아름다움에 찔끔, 눈물이 났다. 이름은 모르지만 어떤 별자리일 것이 분명한 별들의 무리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럴 때 들어야 하는 노래가 있지! 하고는 애들의 ANSWER : LOVE MYSELF를 재생했다. 작은 도시가 모두 잠든 것 같아 아주 작은 크기의 소리로.

편의점에서 신중히 고른 아침거리가 담긴 봉투를 쭐레쭐레 흔들며 숙소에 도착해 늦은 체크인을 했다. 주인 할아버지는 온풍기를 밤새 틀어도 되고 온열 기구도 따로 있다고 안내해 줬는데 곧, 그럼에도 아주 따뜻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공기가 데워지는 것과 방바닥이 데워지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센세는 드라이어로 이불 속 덥히기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전기장판과 온돌문화의 소중함을 체감했던 순간. 그렇지만 일찍 일어난 탓에 큰 어려움 없이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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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