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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ERATURE

세렌디피티의 연속이었다, 틀어진 계획 덕분에

KNACKHEE 2019. 4. 8. 13:53

십 년 차 친구 이 센세와 떠나는 첫 해외여행, 다카마쓰_02


전날 협의한 대로, 먼저 일어난 센세는  시간 일찍 공원으로 출발했다. 혹여  의지가 바뀌었을까 해서 같이 나갈 것인지를 묻는 센세에게 이불 속에서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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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가 나가고도   이불 안에 있다가 느긋하게 준비를 하고 잠깐 QT 책도 펼쳤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이었고 본문 해설  '자발적인 사랑의 의무'란 표현을 곱씹었다. 타인을 위해  유익한 방식으로 내게 주어진 자유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또한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말씀이 엄격한 율법의 지킴이 아니라 타인의 상황을 배려하라는 맥락에서 등장한다는 것에 놀랐다. 말씀을 조각조각 아는 건 위험하다.



등교, 출근 시간대에 거리로 나가니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여긴 한국과 달리 자전거가 인도 위를 달렸는데 아무런 위협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쩜 자전거도 이렇게 차분히 탈 수 있는 건지!

센세는 공원이 와이파이존이라는 안내 책자만 믿고 도시락 와이파이를 내게 맡겼는데 공원 와이파이를 잡는 데 실패해 혹여 나와 길이 엇갈릴까  공원 입구 근처에서 서성였다고 했다. 어쩐지 너무 반갑게 맞아주더라고. 일찍 나가 전전긍긍한 게 귀엽고 안쓰럽기도 해 센세의 등을 도닥였다.

산책 나온 여성분의 도움을 받아 나룻배 티켓도 입구에서 구매해야 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일본분들은 대체로 우리가 자신에게 다가가는 동안에는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해 보이고는 막상 도움을 요청하면 무척 상냥하게, 최선을 다해 도움을 줬다.










공원은 시간이 지나며 해가 떠오를수록 곳곳이 반짝였다. 배를 타기 직전에 당고를 사 먹고는 이미 흡족한 기분으로 배에 올랐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수면이 수면과 맞닿은 지면과 수면 위의 모든 조형물에 파동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물무늬를 보고 있으니 코끝이 저렸다. 언제나 그렇듯. 너무 고요하게 아름다워서. 건축물 근처엔 조경 작업이 한창이었다. 생활이 느껴지는 그 장면에 자꾸 눈이 갔다. 공원의 메인 다리를 보며 모네의 그림을 보지 못하게 된 아쉬움을 달랬다.




예상보다 전철이 늦게 도착해 나오시마로 가는 일반선을 놓쳤다. 다음 일반선까진 두 시간여를 기다려야 했고 고속선은 한 시간 뒤에 있었다. 가격이 두 배 넘게 차이가 났지만 여행에서 시간을 버리느니 돈을 쓰지, 하는 마음으로 고속선 탑승을 결정했다. 또 여기까지 왔는데 고속선 함 타 줘야지! 싶기도 했고. 시간을 때우려 들어간 항구 근처 카페 'PRONTO'는 이번 여행의 세렌디피티였다. 라테도, 바움쿠헨도 기분이 포근해지는 맛이었다.




나오시마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가 가장 먼저 만난 건 베네쎄 하우스 앞 해변에 놓인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 정보를 찾아보니 아동학대를 당하며 방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리던 그가 어느 날 호박에 매료돼 이를 작품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호박의 땡땡이무늬는 강박의 표현이라고. 그런 걸 보면 예술가는 결국 운이 중요한 직업인 것 같기도 하다. 모두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고 그중 대중의 취향을 저격하거나 시대·사회적인 이슈와 맞물린 것들만 인정받고 돈을 번다. 확률 게임이 아닌지!

베네쎄 뮤지엄 지하에 전시된 작품에는 100개의 죽음과 100개의 삶이 대칭으로 반짝였다. 삶은 결국 죽음을 향해 가고 매일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건 매일 최선을 다해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센세는 죽음이 아쉽기보단 두렵다고 했다. 더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까. 종교의 영향 때문인지 죽음이 두려웠던 적은 없다. 오히려 두려운 건 지옥이었지. 크면서는 죽음이 너무 늦게 찾아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두려웠다. 종종.

작품마다 준비된 영어 안내문을 열심히 해석했다. 그러다 해석 없이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면, 에 생각이 미쳤다. 해석을 열어두는 작품이 있고 의도하는 작품이 있는데 후자의 것을 설명 없이 알아채지 못하면 그건 서로의 실패인 걸까.

뜻밖에 전시가 좋아서 모네의 그림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전시 관람을 끝내고 밥을 먹으러 가기 위해 바다를 따라 걸었다. 여기저기서 공사 중이라 흙먼지를 애피타이저로 먹으며 놔버리게 되는 관계를 이야기했다. 지금보다도 더 어릴 땐 모든 관계에 전전긍긍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게 된 것 같다고. 그리고 시기마다 채워지는 새로운 인연들이 있고, 오래 함께하는 관계는 고맙고, 그렇지 못한 관계는 어쩔 수 없고.


버스 시간까지 또 시간이 떠서 카페에 갈까 했으나 이 섬의 카페는 늦은 세 시에서 네 시면 모두 마감을 했다. 날은 추웠고 비까지 오기 시작해 버스 정류장 맞은편 ATM 기기가 있는 곳에서 과자를 까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섬에서 나갈 때는 일반선을 탔는데 정말, 정말 느렸다. 계속 시동만 걸고 있는 줄.

쇼핑거리의 음식점도 늦은 여섯 시에서 일곱 시면 모두 문을 닫았고 아예 저녁 장사를 하는 이자카야 같은 곳들이 영업 준비로 분주했다. 원래 가보려던 우동집도 그런 상황이라 마감 시간이 좀 늦은 우동집 '엔야'를 찾았고 고민 없이 블로그에서 본 가라아게 붓가케 우동을 주문했다. 따로 나온 국물을 부어 먹는 건지 찍어 먹는 건지 몰라 음식을 앞에 두고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점원이 와 부어 먹으면 된다고 알려줬다. 가라아게의 튀김 옷은 꿔바로우처럼 쫀득했고 살도 아주 실했다.


우리는 어느새 숙소를 '우리 집'이라고 부르며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머문 에어비앤비는 실제 사람이 살고 자리를 비울 때만 내어주는 공간이 아니라 숙박업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었지만 '집'의 형태라는 것만으로 호텔과는 다른 느낌을 줬다. '살아 본다'까지는 아니지만 '들른다' 보단 '머문다'에 가까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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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