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LOG

아고리 아저씨

KNACKHEE 2016. 7. 5. 21:05

 

선배랑 덕수궁미술관에서 절찬리에 전시 중인 이중섭 아저씨 전을 봤다. 오전까지만 해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오후에 잦아들어서 변동 없이 만났다. 하지만 궁을 가로질러 미술관까지 가는 그 짧은 순간 장대비가 쏟아진 건 안 비밀. 둘 다 손에 든 우산이 무색하게 젖었다. 심지어 둘 다 흰 운동화였는데!

 

만나기 전에 이중섭 아저씨가 가족,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을 다 읽고 가서는 전시 내내 선배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선배는 대표작인 소 그림만 생각하고 굉장히 마초적이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편지를 저렇게나 다정하게 쓰는 사람이었냐며 놀랐다. 어제 동양화를 전공한 은경이한테 들은 건데, 아저씨는 가족에게는 한없이 다정했지만 그림에 관련해서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냉정하고 엄격한 사람이었다더란 얘길 전했다. 은박에 그린 그림은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그림을 그렸던 그 열정의 결과물들을 마주하며 얼마 전 읽기를 끝낸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가 생각났다. 붓터치 때문인지 문득문득 고흐 아저씨가 생각나기도 했다. 가족을 그렇게나 사랑하는 사람이 시대적인 상황 탓에 가족과 함께할 수 없었음이 속상했다. 말년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원망하며, 가족의 생계조차 해결하지 못하는데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지금껏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고 울부짖었다는 설명을 마주하고서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시대만 변하고 세상은 변한 게 없구나, 싶어서.

 

네 개의 전시관을 모두 둘러보고 만족한 마음으로 미술관 한 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저녁 먹을 곳을 검색했다. 덕수궁 주변엔 정말 뭐가 없었다. 선배는 파스타를 제안했다. 나는 소신 있게 피자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낙찰. 꼭꼭 씹어 치즈가 흥건한 시카고 피자를 먹고 나왔는데도 하늘이 밝았다. 몇 시까지 들어가야 하냐는 말에 열두시요! 했더니 선배가 웃었다. 커피를 사겠다며 선배의 팔을 잡아 끌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신이 나서 예쁜 정동교회도 소개했다. 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세운 거라고 했더니 선배가 급 관심을 보여 기웃기웃 거리다가 목적지인 전광수 커피에 안착했다. 2층 창가에 앉아 있는데 비가 와서 창밖으로 운치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커피 맛도, 분위기도 좋다며 만족스러워 하기에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의 선이 무척 예뻐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건드리며 손이 진짜 예쁘다고 감탄했다. 선배가 손만 예쁘면 뭐 하냐고 하기에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이렇게 손만 내놓고 다니라,고 했다. 선배는 그걸 또 받아줬다.

 

사위가 어둑어둑해지고 다시 돌담을 끼고 지하철 역으로 가는데 선배가, 서울 온 뒤론 연애를 안 해서(선배는 우리 학교에 편입했다) 서울 데이트 코스라고 이름난 곳들을 가본 적이 없다고, 그래서 덕수궁 돌담길도 처음 걸어 보는 거라고 했다. 선배의 처음을 차지했다는 생각에 괜히 또 신이 났다. 또 오래 걸려서 집에 가야겠네, 하는 말에 네, 했더니 보통은 아니에요, 괜찮아요, 라고 하지 않냐며 선배가 웃었다. 내가 너무 단호했죠, 했더니 자기가 많이 편해졌나보다며 또 웃었다.

 

 

 

 

그리고 잔해.

 

 

마음은 이렇게 또 갈피를 잃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