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정산
연말정산 01. 상황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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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자주 떠올리는 드라마의 대사 중 하나는 <기황후>에서 '탈탈'의 것이다. 자신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승냥에게 탈탈이 말한다. "배신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시절이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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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를 관통하는 생각은 상황과 관계였다. 처음에는 각자를 둘러싼 상황이 변함에 따라 이전과는 결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관계를 어떻게 잡아둘 수 있을지 고민했다. 세 계절만에야 애초에 질문의 방향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생각했다. 결국 잡아두고 싶었던 모든 것은 변화하고야 말 텐데, 그럼 그 상황 속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그러던 차에 이웃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이웃의 속성은 지금, 여기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어, 그렇다면 나는 이웃의 속성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걸리적거리지 않는 적절한 배경일 수 있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연말정산 02. 세렌디피티와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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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보통 세 가지 경우에 화를 냈다. 거짓말을 하거나 예의 없게 행동했을 때, 성적이 떨어졌을 때,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지 않았을 때. 그러니 크리스마스카드 쓰기가 자연스러운 일일 수밖에. 다행히 좋아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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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래왔듯 지난 크리스마스가 끝난 날부터 올해의 크리스마스를 기다렸다. 언제고 상관없이 "이제 곧 크리스마스야!" 하고 떠들었다. 다들 벌써? 하고 반문했지만 나에겐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떠올리는 모든 날이 크리스마스와 맞닿아 있었다. 올해는 특히 2016년 이후로 쓸 여력이 없었던 크리스마스카드를 다시 보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다만 수십 장을 수작업할 여력까지는 안 돼서 사진을 고르고 문장을 고민해 공정을 외주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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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에 담으려던 건 세렌디피티와 희망이다. 사진은 올초 울산으로 출장갔을 때 찍은 거다. 너무 멀었고 관광지도 아니었고 퇴사는 코앞이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마음을 안고 갔는데 뜻밖에 근사한 풍경을 만났다. 다녀온 후에도 오래도록 잔상이 남았고 숨이 답답해질 때마다 저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희망은 지난 카드에도 적었지만, 크리스마스 그 자체다. 삶은 계속해서 녹록지 않겠지만 예수님이란 살아 있는 희망이 있는 한 우리는 괜찮을 테다.
연말정산 03. 밝은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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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 인생에서 주로 들었던 말은 이런 것들이었다. /기분 별로야? 마음에 안 들어? 화났어? 첫째죠?/ 그런데 요즘엔 인생 최초로 이런 말들을 듣는다. /어떻게 이렇게 밝아? 어어- 왜 이렇게 끼를 부리지? 막내죠?/ 무척 놀라운 기분이었고 썩,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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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부자니까. 또 생각을 해봤다. 생각의 끝엔 고맙단 말만 남았다. C사에서 만난 밝고 사랑스러운 친구들 덕분에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뜨거운 생활' 친구들. 매달 만나 독서 모임을 빙자한 잡담회를 해온 3년 중 1년 반을, 암울한 표정으로 죽을 쑤며 앉아 있었다. 그런 나를 견뎌주고 받아준 친구들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 사랑한다.
연말정산 04. 담대함과 자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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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비슷한 듯하지만 성질이 꽤 다른 필드로 이직을 했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고 싶어서, 일을 못한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올해의 나는 내내 눈치를 보고 지난 장면들을 곱씹었다. 쉽게 오만해졌다가도 곧장 의심의 늪으로 기어들어갔다. 눈을 잠깐 감았다 뜨면 아침이 됐고 내가 자고 있다는 걸 인지하는 상태의 밤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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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년의 키워드는 담대함과 자유함으로 정했다. 잘 하고 싶다. 오래, 재미있게.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나는 나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중심을 잘 잡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