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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1-02_완벽한 대칭의 날

KNACKHEE 2020. 2. 2. 13:31

20200201

 

 

신청해뒀던 클래스가 있는 날이었는데, 쉬는 날 저녁에 홍대에 가야 한다는 게 귀찮아서 조금 망설여졌다. 그래도 돈을 냈으니까, ... 하는 마음으로 다녀왔고 애매했던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동네책방에 관한 원데이 클래스였는데 책방으로 번 돈은 책방으로 모두 들어가 거의 또이또이고 본업과 책방을 하며 연계해서 하게 된 강좌 등 외부 활동으로 발생한 수익으로 생활이 지속되는 형태였다. 운영자님은 이 작은 책방을 그래도 3년이란 시간 동안 해올 수 있었던 것은 책과 책방이라는 본질, 방향성을 잃지 않고 이곳만의 콘텐츠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책방뿐만이 아니라 뭘 하든 여러 가지 면에서 나를 정립하는 게 우선이고, 그랬을 때 나의 것이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같은 결을 지닌 사람들과 일하게 되는 장기전을 생각해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리지 않고 내가 지향하는 방향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그것이 절박한 대상이 아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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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등록금을 내려면 추가로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다. 대학교를 다니기 위해 빌렸던 것을 그래도 성실하게 갚아나가고 있으니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사유로 대출이 거절됐다. 대안을 알아보긴 했지만 사실 기존의 곳에서 빌리는 게 제일 나으니까. 월요일에 전화를 해봐야지 싶다. 그런데 보통은 이렇게 주말을 껴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이 아주 괴로운 편인데 이번엔 마음이 그렇게 크게 어렵진 않다.

 

 

20200202

완벽한 대칭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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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가 살던 지역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다가 기술의 발전으로 세계가 같은 생활권이 되고 거리가 좁혀졌다, 등의 카피들이 떠올랐다. 발전했고 좁혀진 건 맞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얼굴 한 번 보기조차 쉽지 않다. 거리, 지역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각자의 생활이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아쉬워하고 안타까워만 하는 인생을 사는 건 더 큰 문제고. 거친 결론이지만, 결국은 매순간에 진심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러려면, 언제 찾아올지 모를 그 진심의 기회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매일의 내가 괜찮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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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내내 꿈을 꿨다. 작은 강의실 같은 곳이었고 앞에 있던 사람이 내게 왜 A교수가 인기 있는지 물었다. 나는 현실에서와 달리 또박또박하고 막힘 없이 내 생각을 정돈된 문장으로 말했다. 모두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데 그분은 타인을 언제나 진심으로 살핀다고. 그 마음이 전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 않겠느냐고. 중간에 누군가 난입하는 소동이 벌어졌는데도 나는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잠시 끊겼던 말을 다시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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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출석하던 교회에서는 청년부 임원을 하고 찬양팀을 하고 주일학교 교사를 했다. 매일 왕복 5시간의 통학을 하고 나면 도저히 토요일을 교회에서 보낼 수 없는 날이 생겼다. 한 번은 과제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찬양팀 전도사님에게 오늘은 연습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대뜸 지금 당장 예수님이 오신다면 과제를 하고 있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 중 어떤 모습을 더 흡족해하실 것 같느냐고 물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런 류의 '준비됨'에 대한 질문에 거부감이 생겼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제목이 '준비되셨습니까?'였다. 기존에 들은 것과 같은 형태의 것을 듣게 될까 봐 살짝 긴장했는데 전혀 다른 내용이었고 덕분에 '준비됨'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었다. 아, 그리고 그 당시에 그래도 우리 청년부 전도사님의 말씀이 참 감사했는데, 내가 저 상황을 들고 가자 '네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성실히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니 나는 지금 뫄뫄 네가 과제를 하러 갔으면 좋겠어'라고 해주셨다. 그런데 그런 분한테 이후에 내가 치기 어리게 굴었던 순간들이 많아 지금도 생각하면 이불킥을 한다. 너무 어리고 어리석었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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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말씀 / 디모데후서 04장 06절-08절 "준비되셨습니까?"

당신은 준비된 사람인가? 어떻게 준비가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나? 우리는 절대 우리의 때를 알 수 없다. '준비됨'이 중요한 이유다. 본문은 사도바울의 마지막 메시지다. 그는 자신의 리더십이 젊은 지도자인 디모데에게 갈 것을 알았다. 대부분 신약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잠'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또는 무너지다, 조용한 휴식 등. 이 땅에서의 삶은 장막과 같다. 장막은 일시적인 것이다. 우리에겐 곧 장막을 접어서 넣어두고 영원한 집으로 가야 할 때가 온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에 '떠난다DEPARTURE'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느슨하게 하다, 풀다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데 주로 동물을 풀어주거나, 죄수를 풀어주거나, 항구에 정박해 있던 배를 떠나게 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바울에게 죽음은 이런 의미였다. 그는 준비된 사람이었는데 무엇보다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디모데후서 04장 07절에서 그는 자신이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한다. 이때 선한 싸움GOOD FIGHT을 수식하는 관사는 A가 아니라 'THE'다. 그는 불특정한 싸움을 싸운 게 아니라 '바로 그 선한 싸움'을 싸웠다. 자신의 창조의 이유인 옳은 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싸움을 싸웠다. 이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마태복음 06장 33절)이다. 우리는 왜 창조되었는가?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면 내 삶은 미완성 교향곡이 되어버리고 만다. 후회로 가득한 마지막을 맞이할 테다.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 없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하지 않은 일들로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런데 이와 더불어 필요한 자세는 현재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조심하고 예방하되 불안해하진 않아야 한다. 패닉 버튼을 누르지 말 것. 또한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바울과 같이 선한 싸움을 싸웠다면 미래에 남은 것은 승리의 면류관뿐이다. 하나님은 오심을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기만 하면 되는 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