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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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나오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걷는 행위 자체가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집에만 있었으니 5일 만이었네. 목적지로 찾아간 바에서는 좋아하는 작가님의 사진전이 소규모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꼭 바에 갔는데 사진전이! 느낌인데 사실은 그 반대다. 전시를 보기로 먼저 정하고 마침 장소가 괜찮아 보이는 바니 거기서 머물기도 할까!가 된 거다. 애니웨이, 사장님을 통해 작가님이 남미의 바다에서 사막의 느낌을 받아서 바다 사진을 사막과 같은 색감으로 보정했다더라는 설명을 전해들었다. 마음이 사막 같을 때 바다를 찾는 건, 어쩌면 볼 수 없는 심연을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봤는데 무엇보다 두 번째 잔으로 마신 버번이 흥미로웠다. 미드에서 아저씨들이 차고에서 이것저것을 하다가 술병과 잔을 꺼내 옷에 쓱쓱 닦아 따라 마시던 그것! 미끈미끈한 질감이었고 옥수수를 베이스로 한 것인 만큼 옥수수 맛이 났으며 약간의 버터향과 스모키함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병이 너무 예뻤다. 이곳은 선택한 음료를 잔에 채운 후에 병도 함께 놓아주는 점이 좋았다. 각기 다른 특색을 가진 병들은 그 자체로 오브제의 역할을 했고 내가 어떤 특징이 있는 음료를 마시고 있는지 상기함으로써 그 맛에 좀 더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 마신 것의 테이스팅 노트를 기록할 수 있는 게 이 바의 시그니처이기도 했는데, 나는 정말이지 맛을 구분하고 표현하는 데에는 영 재주가 없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
B와 나는 바의 중앙에 앉아 옆 손님들의 대화에 끼기도 하고 92년생 사장님, 98년생 알바생과 대화를 섞기도 하면서 천천히 잔을 비웠다. B는 타인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는지가 늘 궁금하다고 했다. 가끔은 누군가가 자신이 발전할 수 있게 이왕이면 나쁜 평가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러고 보면 타인의 나쁜 점을 발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고 업무와 비슷한 무언가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나는 인간적으로 평가받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고 커리어와 같은 능력 측면에서만 평가받고 싶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인간적으로는 그저 나를 만들어가고 싶을 뿐이고 업무적으로는 정체되지 않고 싶다. 내가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가 오늘 좀 더 명확해졌다. 인간관계로 힘들었던 지점들도 돌이켜보면 내 능력 부족으로 그 관계에 실패했다는, 그런 업무적인 시각에서 바라봤기 때문인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 B에게는 딥디크 디스커버리를 선물받았다. 향을 맡자마자 내가 떠올랐다는 말에 나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장미 향이긴 한데 보편적인 플로럴 향이 아니라 풀내음이 섞인 싱그러운 장미 향, 이라는 설명을 덧붙여줬는데 기쁘지 않을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