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얼굴을 샀다



갤러리들 오픈 시간 체크도 안 하고 막연히 10시면 다들 열겠지, ... 하고 갔다가 두 번이나 허탕치고 국현 서울 오설록에서 짧은 시간을 보냈다.







원성원 작가님의 이번 개인전 설명의 첫 두 어절은 이 전시 속으로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를 명료하게 안내해줬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본투비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을 리 없지.
특히 작가님의 작품에서 '나무'가 인간을 대신하는 대상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Nurtured Childhood>라는 작품이 좋았다. 개별 가정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양육이 이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그랬던 것 같다. 나무는 표면 위로는 꼿꼿하게 홀로인 듯 보이지만 땅 속에서는 결국 얽혀 있으니까. 그런 맥락에서 사람을 대신할 것으로 나무를 선택하겼다는 게 또 혼자 좋았다.










도시의 사람들과 건축물 사이를 거닐며 그 장면의 일부가 되는 경험. 타인의 속으로 들어가 타인이 되는 일.
"3D 가상공간에 작품을 배치하고 VR 고글을 낀 채 가상의 전시장을 직접 둘러보는 방식으로 동선을 섬세하게 기획, 구성했다"는 설명글을 보고 기술이 예술의 영역에 이런 방식으로도 영향을 미칠 수 있구나, 싶었다.






꼭 울음을 참고 있는 것만 같은 얼굴이어서. 밤이 내려앉은 거리를 걷다가 낮에 잔뜩 엎지른 내 멍청함이 떠올라서 코끝이 시큰거릴 때. 그 상황의 어느 것 하나 내가 되고 싶었던 내가 아니었어서 마음이 엉망일 때. 그렇지만 길바닥에서 울 수는 없으니까 눈에 힘을 주고 숨을 참으며 입술을 꾸욱, 누를 때. 내겐 이 얼굴이 그렇게 보였다.
작품을 구매하는 건 관람만 했을 때와는 또 다른 경험이라기에. 올해부터는 그 부분을 좀 더 적극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번 전시 포스터를 보자마자 생각했다. '내가 처음 구매하는 작품이 엄유정 작가님의 이 시리즈면 좋겠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포스터에 사용된 그림에는 이미 빨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 찬찬히 그림을 보는데 이 얼굴이 발걸음을 붙잡았다.
큐레이터님인 줄 알고 가격과 구매 방법을 여쭤봤던 분은 작가님이셔서 화들짝 놀랐다. 기대도 못한 팬미팅을 하고 사인도 받고 지금과 같은 이 친구의 얼굴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덕후도 가끔은 계를 탄다. 럭키. 이 벽에 걸린 시리즈 중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해서 첫 번째로 걸어두셨다고 했다. 또 그림을 고쳐 그리면서 지운 흔적이 마음에 들어서 일부러 그냥 두고 덧그렸다는 얘기도 덧붙여주셨다. 그 부분 덕분에 그림이 더 입체적으로 보였다.
아, 작품을 구매하는 건 뭐랄까. 그림이 내 공간과 마음에 놓일 장면을 상상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좀 웃기지만, 언젠가 내 컬렉션을 전시하게 되면 어떤 주제와 콘셉트로 설명하게 될까, 내가 만난 작품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슨 얘기를 건네게 될까,를 생각해보는 일이기도 했다. 늘 마음만 앞서지 뭐. 또 아. 사실 작품을 구매하면서 미술시장적인 측면까지 고려해봤으면 좋았겠지만, 아직은 거기까지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그러기엔 경제적인 부분도 안 따라주고.

어제 퇴근하면서 챙긴 마우스를 빼놓는 걸 까먹어서 내내 들고 다녔다.












국중박에서는 뜻밖에 귀여운 오브제들을 많이 만났고, 너무 넓어서 아주 지쳐버렸다. 그러면서 문득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는 어떻게 그렇게 넓은 곳들을 온종일 보러 다녔지, ... 하고 새삼 신기했네. 아니 그런데 간 김에 다 봐야지 어떡해, ...

또 조금 미리. 축하해, 생일!






카페에 손님은 우리뿐이었고, 분위기도 맛도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여기 진짜 좋다" 하고 말했다. 오늘 또 몇 개의 전시들을 하루에 압축해서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글로 그림을 이해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