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 어디 있어
자연 현상은 정확히 예측하기도 어렵거니와 예측하더라도 이를 고스란히 마주하고 견뎌내는 것 외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가 많다. 작가는 그중에서도 '폭풍'을 '불안'이라는 감정과 엮어서 작품으로 풀어냈다. 그 거친 상황의 전과 후, 한가운데에서 경험하게 되는 촘촘한 불안들이 그림 앞에 서는 순간 너무도 생생하게 밀려와서 폭풍 세계관에 흠뻑 휩쓸려버리고 말았다.
<거친 바람이 내 마음에 휘몰아칠 때>는 보자마자 그 크기와 느껴지는 역동성에 우와, 했고 제목을 보고 나서 다시 마주하고는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런 날이었어서.
작품 곳곳에는 '마리'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숲 속의 마리>에서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붉게 충혈된 눈이 인상적이었고, 그림에 불안이란 퍼소나가 '인간 표정'의 형태로 등장한다는 게 흥미로웠다. 마리가 하얀 새를 마치 보호해주려는 듯 손에 조심스럽게 들고 있는 <마리와 하얀 새>를 보면서는 언제나 서로를 돕는 건 동병상련의 애처로운 사람들이지, 하고 생각했다.
불안한 상황에 해가 곧 진다면 그 숨은 마지막 숨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이 또 더해지겠지. 2층의 초입에는 <해지기 전 마지막 숨>이, 후반부에는 <고요한 밤 늦은 밤>이 걸려 있었다. <고요한 밤 늦은 밤>의 왼쪽 상단이 꼭 앞서 봤던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새의 눈을 떠올리게 해서, 그 새가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풍경의 일부가 된 스토리로 읽히기도 했다.
데스크 너머 업무 공간의 일부를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 것도 신선해서 인상적이었다. 제목과 위치가 적힌 종이를 보면서 설마? 하고 바라본 곳에 작품이 있었다.
부조리에서 삶의 결핍을 발견해버린 예술가의 시선은 자신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설치미술가 아이 웨이웨이의 작업은 권력에 억압된 표현의 자유를, 국가간 이익 다툼에 침몰한 인간의 생존권을, 스스로를 파괴해가면서까지 새로운 것이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아우른다. 변화는 언제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짧고 강렬하게 타오르다 소멸한 빛들의 축적으로 만들어진다.
작가의 작업 비하인드와 연관 자료를 놓아둔 곳의 철창은 감옥을 연상하게 했다. 직전에 보고 나온 작품은 <옥의>였는데 한자로 '좋은 옷'이라고 표기된 이 단어는 '감옥에서 입는 옷'과 동음이의어였다. <옥의>는 CCTV와 트위터의 새 아이콘 무늬의 <라마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파카인 동물>로 둘러싸인 공간의 천장에 매달린 인간의 형태였다.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꼭 물 속에 잠겨 수면 위로 떠오른 시체와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둘러싼 시선이 감시인 줄도 모른 채 물 속에서 서서히 질식해가는 것과 죽음으로 그것에서 해방된 신체 중 무엇이 더 안된 일일까.
<코카콜라 로고가 있는 신석기 시대 화병>과 <색을 입힌 화병들>을 보면서는 레디메이드로서의 유물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 전 다녀온 리움에서는 레디메이드로서 인간의 몸을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을 만났는데. 이제 막 새로운 세계를 알아버린 학부 1학년생처럼 레디메이드란 개념에 집착하고 있어서 그렇다.
이것은 예술일까 정치일까. 예술을 통해 사회 정치적 문제를 발화한 것일까 사회 정치적 이슈를 위해 예술을 도구로 사용한 것일까. 아무래도 한 전시관 놓치고 안 보고 온 것 같으니까 한 번 더 다녀오고 생각해보는 걸로,... 물론 답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평생 시기마다 다른 짧은 유효기간의 답만을 갖고 있게 될 것 같다.
들어가고 싶은 자와 탈출하고 싶은 자.
너무 궁금했던 신세계 본점의 크리스마스 미디어 아트를 Y 언니와 봤다. 만남의 목적이 거기서부터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