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LOG

아주 오랜만에 전체 염색을 했고 내일 또 서울에 가야 해서 벌써 고되네

KNACKHEE 2022. 3. 19. 19:36

아무리 프로모션을 돌려도 반응이 오지 않는 외부 채널이 있어서 담당 엠디한테 그쪽의 고객들의 현황을 좀 공유해달라고 했더니 자기네 고객들은 트렌드에 민감하기 때문에 매체에 노출된 것들이 필요하다는 식의 답을 해왔다. 그걸 보면서 유행에 민감하다는 건 어쩌면 취향이 없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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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외부 미팅을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표님은 내가 P님께 묻고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이 무어냐 물었다. 인생의 궁극적인 꿈을 물었다고 했더니 곧장 그 질문을 내게 돌려줬다.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 시기의 아이들에 관심이 많고 혼란스러운 시기의 아이들을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돕는 일을 하고 싶은데 어디에 초점을 맞춰서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요즘에 내가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걸 잃어버린 것 같아 더 모르겠다고 답하며 how about you를 시전했다. 대표님이 자기는 좀 싸패 같은 면이 있다고, 사업을 하면서 감정에 휘둘려 힘든 일이 많아지다 보니 원래도 아주 좋지만은 않았던 공감 능력이 좀 떨어지게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은 잘 됐으면 좋겠고 자신이 사회적으로 커리어를 인정받는 인물이 되면 누군가를 돕는다거나 하는 그런 것들은 부가적으로 따라오고 커버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고 하시기에 공감 능력과 선한 마음은 별개의 문제인가 봐요, 하고 말하며 나의 공감 능력에 대해 속으로 자문했다.
별로. 난 사실 남한테 별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그 시기의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이는 건 내가 그 시기에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앞서 대답을 할 때는 빠뜨린 부분인데, 부모의 경제 상황이 괜찮을 때는 주변이나 친척들에게 베푸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아빠라는 사람이 사업과 투자로 가계를 말아먹었고 나는 생각도 못했던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됐다. 학교에서는 급식비를, 학원 원장이었던 친구의 아빠에게선 학원비라는 도움을 받았다. 대학 지원 원서를 여러 장 쓸 상황이 안 됐는데 고모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것으로 안다. 대학에 가서도 고모의 호의로 첫 과외를 구할 수 있었고 교회 친구의 도움으로 과외가 끝나 막막할 때 또 다른 과외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졸업 학년 때는 과외가 다 끊어졌는데 그때는 외할아버지가 자신이 참전했던 대가로 받는 지원금에서 일부를 내게 용돈처럼 주셔서 학자금 대출의 형식으로 받는 생활비 대출을 더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나를 좋게 봐준 고등학교 때의 학원 부원장 선생님은 대학생이 된 내게 가끔 집을 비우게 되면 아이를 맡기고 알바비를 줬다. 특목고 논술 알바까지 주고 싶어 했지만 남의 인생까지 대신 살아줄 수는 없어서 그 도움은 거절했다. 신의 은혜와 선하심은 디폴트였고. 그 시기를 모른 체하고 사는 사람이고 싶지 않아서, 공감 능력이 좋지 않은데도 그쪽에 자꾸 마음이 쓰이는 것 같다.
대학원에 가기로 한 뒤로는 자꾸 중학교 때 철없이 꾸던 꿈이 눈에 밟힌다. 경제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예술 고등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조금은 거창한 꿈이.

오랜만에 전체 염색을 했고 제발 브릿지 부분의 색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게 빠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의 뜨생도 무사히 마쳤네. 실은 뜨생을 마치고 바로 화랑미술제로 넘어갈까 했으나 미용실에 앉아 있으면서 마음을 바꿔 먹었다. 시간에 쫓기고 싶지 않아서. 생각만 해도 숨이 찼다. 그런데, 그래서 내일 또 서울에 나갈 걸 생각하니까 이미 몸이 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