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LOG

돈이 많으면 더 많은 걸 지킬 수 있을 텐데,

KNACKHEE 2022. 5. 14. 17:52

톤다운된 색들의 조합, 동양의 산수화에서처럼 자연 속에 아주 작게 그러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들, 그리고 타이틀인 <SUNDAY>. 이 전시에 가지 않을 이유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스페인은 쨍한 햇볕의 느낌이었는데, 느지막한 오후의 나른한 햇볕이 내려앉은 듯 다운된 톤과 눈 쌓인 산들이 인상적이었다. 몇몇 그림들에선 고흐의 붓터치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림 속 자연은 산이든 바다든 눈밭이든, 내딛는 걸음마다 그대로 푹푹 꺼지며 포근하지만 집요하게 발목을 붙잡을 것만 같았다.
SUNDAY를 타이틀로 달고 있는 짧은 문장들읕 보면서 작년, 필요에 의해 작성했던 검열과 보편화를 거치기 전 버전의 토막글을 떠올렸다.

/금요일에는 누구보다 빠르게 퇴근을 할 거야. 집에 가야 하거든. 아,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벤앤제리스를 사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지난 연말에 산 위스키가 아직 남았거든.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하고 새로 산 잠옷으로 갈아입어야지. 방에 불은 켜지 않는 게 좋겠어. 조명은 모니터 불빛으로 충분할 테니까. 잔잔한 자연을 배경으로 좋아하는 인물들이 움직이는 영상을 틀어놓고 의자에 몸을 한껏 파묻을 거야. 그럼,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와씨, 행복해."/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얻고 싶었던 심상은 비슷할 것도 같아서.
일반적인 유화랑 느낌이 다른 게 흥미로워 이유를 여쭤봤는데 그냥 작가가 오일 페인팅이라고 했고 그 외의 얘긴 없었다,는 답밖에 얻을 수 없어서 좀 아쉬웠다.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알고 나면 풍성해지는 것들이 있는데. 사실 필수품이 아닌 분야에선 그런 게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작가 자신이 정의하는 예술은?'이란 공통 질문에 각기 다른 열 개의 다른 목소리가 한 공간에 공존했지만 소란하지 않았다. 자신의 세계 안팎을 골고루, 또 성실하게 '들여다본' 후에 내어 놓은 답들인 덕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과정을 거친 결과물들은 필연적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면서 자기 이야기를 포개는 유연함과 다정함을 갖추고 있을 테니까.

A.
원희수 작가님 : 혼란을 탐험하는 여정
오혜정 작가님 : '눈 앞에 있는 세계를 똑바로 마주보게 하는 것’

오늘의 뜨생도 클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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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st Fund Baby의 킬포는 돈이 많으면 더 가질 수 있을 텐데,가 아니라 더 많은 걸 지킬 수 있을 텐데,를 이야기한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