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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KNACKHEE 2023. 5. 6. 18:26

 

부디, 더는 행복이 고민스럽지 않은 곳에서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란다.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팬분들이 계속해서 추모 공간을 찾았고 고요히 자신의 시간을 보내다 돌아갔다.

 

 

지난 3월, 학교 특강으로 스위스 컬렉터 울리 지그의 컬렉팅에 관한 대담을 직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가 소장을 결심하는 기준은 하나였다. '결코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고 생각하게 해주는 것.' 이는 QnA 시간에 나온 '어떻게 나만의 차별점을 지닌 작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도 결을 같이 했다. "글로벌 미술계에 들어가기 위해 중요한 건 '나의 뿌리'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980년대 후반에 컬렉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서구화되지 않고 중국만의 문화와 정서가 담긴 작품들을 만난 덕분이었다." 특강이 끝나자마자 5월의 일정으로 송은의 <울리 지그 중국 현대미술 컬렉션전>을 예약했다.
전시를 보면서 중국 미술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여전히 특수한 그곳의 정치사회적 배경에만 골몰해 중국의 현대미술가들 역시 주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마주한 중국 현대미술가들은 그러한 배경을 기반에 두고 젠더, 노동, 환경 등 오늘날 세계 곳곳에 만연한 사회적 이슈들을 폭넓게 다루는가 하면, 회화와 물성 그 자체를 순수하게 탐구하기도 했다. 민중미술가에서 공공미술가, 환경미술가 등으로 수식어가 변모한 임옥상 작가와 같이 그들도 자신의 중심을 지키며 저변을 확장해나가는 거다.
3층의 한 공간은 젠더 이슈를 다룬 여성 작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차오위 작가가 '흐른다'와 '분출한다'와 같이 여성과 남성에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의 차이를 지적하며 선보인 <Fountain>이 특히 흥미로웠다. 이를 현대미술의 터닝 포인트로 여겨지는 마르셀 뒤샹의 <Fountain>과 엮어낸 것도. 또 뜨개와 같은 여성 노동과 창의력의 산출물들을 전시 공간에 놓음으로써 단순 소일거리가 아닌 작품으로 재위치시키는 후인핑 작가의 프로젝트에도 생각이 오래 머물렀다. 예술과 설득은 극과 극에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이 둘을 이렇게 밀접하게 엮어내다니.
그날 특강의 한방은 이거였다. "Taste Maker가 될지, Taste Taker가 될지 선택해야 한다." 예술과 국가가 대립하던 시기에 탄생한 중국 예술의 가치를 직감하고 체계적인 컬렉팅을 시작해 이를 사회에 환원한 컬렉터의 기조. 그가 자신의 컬렉션 2/3에 해당하는 1510점을 기증했다는 홍콩 M+ 뮤지엄을 중심에 두고 여행 계획을 세워야겠다.

 

 

에르메스 아뜰리에가 10분 거리에 있던 곳에서 일하며 자주 이 앞을 지나쳤는데 그때는 여길 찾을 여유가 없었다. 이제야 이렇게 시간을 내서 오네. 작가와 작품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럭셔리 브랜드가 픽하는 작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던 것도 즐거웠다. 왜 이 작가일까.

 

 

궁금했던 페로탕 도산도 가봤지.

 

큐레이터님 정말 기획 천재시다. 이 전시는 코리아나미술관|space*c(스페이스 씨) 개관 20주년 기념 전시를 큰 테두리로 두고 신미경 작가님을 초청해 기획전과 상설전 모두를 아우른다. 작가님의 작품이 집중된 공간은 코리아나미술관의 소장품이 어우러져 무척 풍성했고, 화장품의 역사를 다룬 상설전은 곳곳에 배치된 작가님의 작품 덕분에 의외성을 띄었다. 작가의 개인전으로서도, 브랜드의 기념 프로모션으로서도 손색이 없었던 전시. 진짜 두 번 말해도 입 안 아프다. 큐레이터님 기획 천재.


비누로 번역한 그리스 고전 조각
: '비누로 번역'했다는 표현 자체가 신선했다. 신미경 작가님의 <번역 시리즈>는 1996년 런던 브리티시 뮤지엄에 전시된 그리스 고전 조각에 영감을 받아 시작됐다고 한다. 이후 계속해서 서양의 고전 조각상이나 동양의 도자기 등을 비누로 재현해왔다. 비누로 하는 번역이라고 하니 꼭 원본에 덧씌워진 프레임들을 꼼꼼하게 씻겨내고 남은 본질만을 보여줄 것만 같았다.

향기로운 전시
: 주재료가 비누인 만큼 전시장은 무척 향기로웠다. 특히 <라지 페인팅 시리즈>가 놓인 공간에 들어서면서는 향긋함에 한 번, 커다란 아름다움에 또 한 번 놀랐다. 녹이고 굳혀서 겹겹이 쌓아낸 비누의 지층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색들이 프레임 안에서 언제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변형되고 흘러가는 것, 그것이 비누의 속성이니까.

인위적으로 만든 시간성
: 전시에서는 <화장실 프로젝트>를 체험해볼 수 있었다. 그래서 전시 보면서 손 세 번 씻음. 낄낄. 이미 다른 곳에서 진행된 프로젝트의 결과물들도 볼 수 있었는데, 비누로 만든 조각상을 곳곳의 화장실에 비치해둔 뒤 사람들이 사용함에 따라 변해버린 모습을 레진, 브론즈 등의 재료로 만들어내는 식이었다. 이는 비누라는 소모품에 새겨진 시간성을 보여준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용품에 박제되어 멈춰버린 특정 시기와 공간의 시간.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두었더니, 시작과 끝이라는 시점을 정하는 건 언제나 기록이라는 데에 생각이 가닿았다.

압구정으로 출퇴근하던 시절의 퇴근길에 이 멋진 뮤지엄 근처를 수도 없이 지나쳤는데 이제야 가 보다니. 인생 헛살았다.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지. 더 열심히 놀러 다니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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