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서점

프로파간다

금정연, 김중혁

 

 

 

 

 

 

 

 

 

 

 

 

 

<작은 서점, 터널 끝 작은 빛>

[금정연: 최근에 책방 만일 이승주 대표님이 웹진 <아이즈>에 글을 썼어요. 제목이 '소규모 서점을 한다는 것, 천천히, 잘, 소멸하기'. 첫 문장이 이거예요. "책방 이야기라면 지긋지긋하다."(웃음)

 

김중혁: 가서 '좋아요' 눌러야겠네요.(웃음)

 

금정연: 계속 얘기가 나왔지만, 어떤 게 잘되려면 결국엔 돈이 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너무 때가 탄 건진 모르겠지만, 저는 모든 일을 돈 때문에 합니다. 지금 서점이 생기는 것이 붐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미디어도 소소한 기삿거리로 쓰기 좋으니까 자주 다르지만, 운영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소진시켜 가는 것, 자기를 착취해 가는 것 외에는 답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김중혁: 천천히 잘 소멸하자는 건데, 우리는 비겁하고 품위 없고 비루하게 소멸해 가고 싶지 않으니까요. 저는 이제 문화, 트렌드, 이런 식의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 나오기 시작한 것 같아요. 혼자서 부업처럼 다른 것도 하면서 서점을 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좀 많아졌을 뿐, 이게 새로운 시장이 되거나 아니면 상업적 판단에 의해서 생기는 건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이 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요? 이 사람들이 5년 뒤쯤에는 어떻게 될 건가, 더 생겨날 건가, 아니면 없어질 건가, 이런 부분을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지금 우리가 굉장히 긴 터널의 어디쯤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가는 것이지, 어디가 끝인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터널 길이가 100km는 될 것 같아요.(웃음) 책은 안 팔리고, 부업은 더 많이 해야 하니까.

 

금정연: 기존의 출판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고정관념 속에서, 관습 속에서, 제도 속에서 진행되어 왔는데, 지금은 많이 바뀔 수 있는 시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문학 쪽에서는 젊은 작가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들이 종이책이건 전자책이건 책이라는 매체 자체를 뛰어넘을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창작의 차원에서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 튀어나올 수도, 기존의 유통망을 벗어나는 새로운 뭔가가 나타날 수도 있는데, 그런 것들이 나왔을 때 지금 거점처럼 마련돼 있는 작은 서점들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 봅니다.

 

김중혁: 터널 저 끝에 작은 빛이 보이는데, 얼마나 가야 할지 모르겠네요.]

 

 

<초청 강연: 호리베 아츠시>

[이렇듯 서점은 책만 구매하는 장소가 아니고 미디어로서, 교육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검색형 온라인 서점의 경우 알고 싶은 것, 예를 들어 근대사의 어느 부분을 조사하고 싶다면 그 부분만 검색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알게 되고 그 외의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프라인 서점의 경우 알지 못했거나 살 생각이 없었던 책도 발견 과정을 통해 구매하면서 지식을 넓혀가는 등 소비 형태를 배움으로 바꿔 주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장을 보면 책의 배열만으로도 어떤 책이 인기가 있고, 세상에서 어떤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서점의 내부를 들여다봄으로써 좀 더 넓은 견해를 장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가게의 영향을 받아 서점에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여기 오신 분들 중에 서점이나 레코드숍 같은 문화를 발산하는 가게를 하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타인의 스탠다드에 흔들리지 말고 좀 작더라도 자신이 가능한 일을 할 수 있는 곳에 환경을 만들어 놓은 다음 '마이스페이스'로 진행하시길 바랍니다. 다만 그걸 하실 때는 그 동네의 사고방식이나 모습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대기업은 마케팅을 주요 수단으로 진행하잖아요? 아무것도 없는 동네에 유행을 타는 가게를 낸 후 유행이 끝나면 가게를 접어 버리는데요. 그런 식으로 돈을 회수하고 끝내면 뭐가 남을까요. 그 마을에서 중시하는 흐름과 사고방식을 이어받은 가게가 지속적으로 사랑받는 거잖아요. 서점은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가야 하는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점 수업>

[정지혜: 제가 생각하기에 온라인 서점은 필요한 책을 구매하는 장소인 것 같고, 오프라인 서점은 내가 몰랐던 새로운 책을 발견하는 곳인 것 같아요.

 

이기섭: 제 관점으로는, 우리나라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들어가고 있는 시점이라고 보는데요. 사실 지금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소득이 적은 유일한 세대예요. 그 이전에는 자식 세대가 다 소득이 높았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실 그동안 문화적 다양성이 자리 잡을 수가 없었어요. 같은 노력을 기울여서 돈을 벌 기회가 있는데 굳이 돈 안 되는 문화적인 일을 하는 것 자체를 사회적으로도 달갑지 않게 봤고, 본인도 굳이 그걸 할 이유가 없었죠. 우리보다 문화적 다양성이 확보된 선진국들을 보면, 남들보다 돈을 더 버는 것 대신 자신의 시간을 의미 있게 쓰는 걸 중요시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더 쓰는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거기라고 문화 쪽 일해서 풍족하게 살지 못해요. 그들이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한 데에는 역사적인 맥락들이 있었기 때문이고요. 저성장시대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다운돼 있는 게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러 가지 부분들에서 좀 더 다양성이 확보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서점뿐만 아니라 저변의 여러 분야에서 이런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로: 책이 안 팔리고 있는데 서점 창업이 왜 붐인가? 저는 오히려 딱 맞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보통 저희 같은 특수 취향을 가진, 서울에 있는 천 명에서 천오백 명이 갈 곳이 마땅치가 않아서 그렇고요. 친구를 만나서 천만 영화를 보러 가고 싶지 않고 카페베네가 가고 싶지 않고 대형 쇼핑몰을 돌면서 쇼핑하고 싶지 않은, 그런 뾰족한 취향을 공유하는 천 명에서 천오백 명이 향하는 곳이 신생 공간이나 독립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거기 가면 자기들이 모여 있거든요. 멀티플렉스에 가면 자기와 정반대 취향의 사람들에게 포위당해 영화를 보게 되는 반면, 정말 조그마한 유어마인드에 가면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진 모르지만 나랑 되게 비슷할 거라는 확신이 있는 상태로 겁 먹을 필요 없이 문화를 소비할 수 있기 때문에. 약간 오글거리는 표현을 쓰자면 피난처로서의 서점이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소수의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피난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서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그렇기 때문에 책 자체가 점점 더 비주류로 갈수록 서점은 점점 더 그 비주류만의 피난 공간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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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이야기들. 그러면서도 확신에 찬 마음들.

 

 

 

 

 

 

 

 

 

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있다

서랍의날씨

젊은 시인 12인

 

 

 

 

 

 

 

 

 

 

 

<박준>

[당시 나는 계간지 신인상 수상작이나 신춘문예의 당선작들을 보며 이 작품이 왜 당선작으로 뽑혔는지, 낙선한 내 작품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타인의 시를 객관적으로 읽지 못했으니 내가 쓴 작품을 객관적으로 볼 수도 없었다. 다시 말해 나는 골방에서 독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타인의 작품에서 장점을 발견하는 순간 내 작품의 단점이 보였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여전히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쓰지 말아야 할 것은 알 수 있었다.]

 

[반면 상대와 나의 감정이 비슷하게 차오를 때 우리는 연애와 사랑의 세계로 전환된다. 연애의 세계에서, 사랑의 세계에서 관계는 더없이 충만하며 인자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감정이라는 불안한 층위에 겹겹이 쌓아 올려진 이 세계는 그리 안정적이지 않고 결코 영원하지도 않다. 그리고 우리는 곧 관계의 죽음을 맞는다.]

 

[어쩌면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 사랑했던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나의 옛 모습일지도 모른다.]

 

 

<서윤후>

[시는 오늘 쓰는 어제의 일기가 아니라, 오늘 쓰는 내일의 일기 같다.]

 

[쓰면서 힘들었던 시절을 극복했다고 보긴 어렵다. 매일이 극복해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게 새겨져 있던 질투를 모르는 척하며 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배웠다. '벌써'와 '아직' 사이를 잰걸음으로 헤매다가 나만 할 수 있는 것을 시에 옮겼다.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이동하는 일을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질투가 내게 시도 결국 사람의 일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시와 잠은 서로 교환한다. 나를 중계자로 놓고서. 그럼 나는 누가 꾸는 꿈일까?]

 

 

<송승언>

[별로 힘들지 않았다. 일단은 등단 전의 시 쓰기, 그것을 '습작'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 말은 등단 전에 쓰는 것들은 그저 등단을 위한 연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인가? 시나 소설, 혹은 여타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모든 이들이 꼭 등단을 위해서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등단을 목표로 습작한 적이 없다. 목표가 없었기에 자연히 힘들 일도 없었다. 그저 시를 쓰고 읽는 게 즐거웠기에 계속했을 뿐이다.]

 

[본인의 인지 바깥에 있을 만한 것을 쓰기 위해서는 결국 그때까지의 기획을, 습관을, 세계를 버리고 좋을지 어떨지 모르는 것들을 쓰러 가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힘들었다고 말할 만한 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결과물이야 어떻든 나는 매번 시 쓰는 게 재미있었다. 재미가 없었다면 관뒀을 것 같고, 그건 지금도 그렇다.]

 

 

<안희연>

['왜'라는 질문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어떻게'는 그때그때 새로운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의 일환이니까 설명하자면 할 수도 있겠지만 '왜' 쓰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떤 말도 제대로 된 답은 아닌 것 같거든요. 다만 예전에는 나를 위해서, 내 고통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시를 쓰고자 했다면 이제는 제 자신을 도구로 인식하는 빈도가 잦아졌어요. (중략) 제 몸과 언어가 공공재처럼 다뤄질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거죠. 나만 좋자고 하는 일이었으면 일기를 쓰면 될 일이지 굳이 등단을 하고 시집을 낼 필요가 없었을 거예요. 자아라는 우물 안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 공인-시인으로서의 책임감을 점점 더 많이 느낍니다.]

 

[모든 일상이 다 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가 못 될 이유도 없죠. 중요한 것은 어떤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감각해 내느냐 같아요. 일상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뭘 써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이 '무엇이든 쓸 수 있는 마음'으로 변모하게 되더라고요.]

 

 

<이우성>

['왜 쓰는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라지는 진실들,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을 드러내기 위해 쓴다. 더해서 나는 감히 의문을 품는다. 이러한 현실을 대면하고도 작가가 침묵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존경하는 훌륭한 선배님들이 그저 여전히 아무런 발언도 없이, 시적인 갱신에 대한 열망도 없이, 변함없이 자신의 시를 쓰고 계시다는 점은 나를 낙담하게 한다. 그분들 역시 들끓는 분노를 가까스로 누르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 질문인 '어떻게 쓰는가'에 대해 대답할 수 있다. 나는 미적인 인식을 더 미세하고 세밀학 드러내는 방식을 발견하며 시를 써 왔고, 지금까지 말한 것과 같이, 이제는 현실을 더 적확하고 정확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 내가 특히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상처받은 마음, 그 마음의 끝을 드러내는 것이다.]

 

[연애의 기억이 아니라, 더 본질적인 사랑의 감정에 대해 써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가 일기와 뭐가 다른가?]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시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것 같다. 다른 무엇이 되고 싶지는 않다. 최근 들어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나는 몇 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 내 시가 아무런 힘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인 나라에서 내 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 내가 시를 통해 무엇인가 바꾸고 싶어 하는구나, 생각했다. 이것은 시를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절대 그것이 아니다. '나에게' 시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대 시가 지향해야 할 것들에 대해 계속, 오래 고민하고 있다. 나는 왜 시인이 되었을까, 나는 무엇에 대해 쓰고 무엇을 위해 쓸까. 나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작가가 되는 순간 아주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겁니다. 내려놓을 수도 없고 내려놓아서도 안 돼요. 이것이 의무입니다." 그 짐은 '시대'다. 나는 시대를 기록하고 증명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의무를 못 본 척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제 안 그럴 것이다. 시를 잊고, 다시 시를 쓸 것이다.]

 

 

 

*

 

 

 

농도 짙은 고백록.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

사이행성

천주희

 

 

 

 

 

 

 

 

 

 

 

 

[한국의 대학 등록금이 높은 이유 중 하나는 대학이 학생들의 등록금에 재정수입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기 때문이다. 김소정은 《대학 등록금 지원사업 평가》 보고서에서 한국과 미국의 사립대학 재정수입구조를 비교한 바 있다. 한국의 경우, 등록금 60.3%, 전입금 8.3%, 국고보조금 3.6%, 기부금 2.3% 등 60% 이상의 수입을 등록금에서 마련했다. 반면 미국의 경우, 등록금 24%, 투자수익 30.7%, 정부지원금 12.3%, 기부금 11.1%이다.]

 

 

[만약 한국장학재단에서 학생들이 착실하게 빚을 상환하고 연체율도 줄었다고 보고를 한다면, 그건 누군가의 주거비이자 누군가의 한 달 식비이자 누군가의 취업 준비비임을 기억해야 한다. 연체율이 줄어들고 학자금 대출 상환율이 늘어난다고 해서, 학생들의 경제적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수치가 감추고 있는 것에 주목하는 일이 장기적으로 한국장학재단이나 교육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한쪽에서는 신용불량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도덕적 해이를 운운하며 "꿈의 가능성에 투자합니다."라고 떠드는, 착한 가면을 쓴 투자자 흉내는 그만 내자.]

 

 

[내가 학생들을 채무자로 만드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학자금 대출을 대학에 갈 수 있는 호혜처럼 여기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입장권을 취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존의 불평등한 구조를 일시적으로 평등한 것처럼 인식한다. 때로는 졸업 이후에 그 불평등한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실상 학생들이 학자금 대출을 받는 순간, 채권자의 관리 속에 들어가며 신용지배사회에 채무자로 입장하는 것이다.]

 

 

[학자금 대출이란, 1960년대부터 빈곤한 계층의 자녀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던 교육복지 정책 중 하나였다. 그러나 IMF 이후, 금융영역으로 외주화된 복지제도로 성격이 바뀐다. 본디 학자금 대출은 금융상품이지만, 사람들이 금융상품으로 잘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빈곤한 사람들에게 혹은 대학생에게 주어지는 '복지적 수혜'라는 관념 때문이다.]

 

 

[정부는 비싼 등록금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학자금 대출을 금융시장에 내맡기면서, 학생들을 금융소비자이자 채무자로 만들었다. 대학에 등록금을 동결하거나 인하하라고 권유하는 대신, 경제적 부담을 학생에게 지운 셈이다.]

 

 

[든든학자금 대출은 대학생이 재학 중에 학자금 대출 원금이나 이자 상환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대출 상환 과정에서는 여느 금융기관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복리계산법이 일반적이라고 하는데, 시중은행에서 복리를 채택하는 이유는 이자를 통해 이윤을 더 많이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그뿐만 아니라 한국장학재단은 자발적 중도상환을 유도하고 있다. 겉으로는 돈 걱정 없이 대학 다니고 생활비 대출까지 받으라고 해 놓고, 일상에서는 자발적 중도상환을 하지 않으면 더 많은 금리를 내야 하고 장기미상환자로 분류되는 셈이다.]

 

 

[한국의 학자금 대출 시장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IMF 체제' 이후 도입된 복지적 성격의 금융이다. '경제 위기'는 국가 차원에서든 가족 차원에서든 학생들에게 학자금 대출을 장려하면서 빚을 지게 했다. (중략) 빚을 지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는 이유는 수요가 증가해서 공급이 늘었다기 보다 공급에 의해 수요가 창출되는 방식으로 변해 왔다고 보는 편이 맞다. 대학 등록금 인상과 가족경제 위기의 대응으로 마련한 복지 정책은 학생에게 대출을 장려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만약에 학자금 대출이 복지라면, 돈을 빌려주는 대신 대학 등록금을 지급해줘야 한다.]

 

 

[학생들은 자신이 교육비용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빚을 진 것에 대해 도덕적 책무감을 지니며 살아간다. (중략) 무엇보다 부모에게 느끼는 채무감을 크게 갖는다. 청년에게 죄가 있다면, 한국 사회에서 태어난 것이다. 빚이 있다고 위축되거나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

 

 

['N포 세대'의 출현은 열심히 해도 더 이상 나아질 것 없는 사회에 대한 개인의 체념에서 시작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취직도, 연애도, 꿈도 존재하지 않는다. 빚 때문에 포기한 것이 아니라, 홀로 감당하기에 너무 큰 비용을 짊어지도록 강요하기에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어 놓아 버린 거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바라고 노력하지만, 세상은 간절함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게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 무기력한 세대라거나, 삶을 포기한 세대라고 더 열심히 살라고 강요하지 말자. 연애도 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사회에서 얼마나 더 노력을 하란 말인가. 이미, 충분히, 노력했다. '버티자니 이 생활이 끝나지 않을' 것을 간파한 이에게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개인의 노력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이 안정적인 삶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대학교육에 대한 교육권을 주장해야 한다. 그동안 정부는 '교육기회의 평등'을 위해 학자금 대출을 장려해 왔다. 그러나 대학(원)생에게 빚을 지우는 방식의 평등이 아닌 개인의 소득이나 자산에 상관없이 누구나 학계에서 교육을 받고 이를 사회적 지식으로 생산하는 방식으로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두 받기 때문에 개인이 열심히 벌어서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 돈을 갚는 동안 당신은 더 즐겁게 살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저당 잡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삶의 태도의 전환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한국에도 청년 부채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곳이 있다. (중략) 그리고 자신의 빚이 무지나 도덕적 해이나 개인의 잘못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취직을 하고 돈을 벌면 학자금 대출금을 금방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갚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해이 때문에 일부러 갚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주택담보대출이나 은행대출을 받는 사람조차 '채무자'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빚이라는 건, 갚고 못 갚고의 차원이 아니라 평생 빚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해야 할 만큼 일상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지 않는가. 학자금 대출이라고 특별하지 않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특별하지 않다는 건, 이미 일상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략) 학자금 대출이 금융상품이라는 사실은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채권자와 채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누군가는 대출을 통해 이익을 취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젊은 날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가야 하는 상황, 대학 진학이 당연시되면서 부채를 끊임없이 강요받는 조건, 이를 둘러싼 문화적 관행과 권력관계 전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장학재단은 복지혜택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등록금을 낼 수 없는 나 같은 아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다니! 나의 무엇을 믿고!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었을 테다. 한국장학재단의 학자금 대출은 철저히 금융/대출 상품이라는 걸 말이다. 대학에 다닐 때 지하철에서 /희망을 대출해드립니다/라는 대부업체의 광고를 보고 희망을 대출해야 하는 사회라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절망적인 사회인 것인가,라고 생각했는데 학자금대출도 그들이 내세운 카피들을 보면 그와 다를 게 없다.

졸업 후엔 상환 관련 메시지를 받았다. 상환 문의는 국세청으로 하라며 번호까지 친절히 알려줬다. 빌렸으면 제때 갚는 것이 당연하지만, 정말 짤없이 개시되는 상환 일정에 치가 떨리기도 했다. 사실 치가 떨린 건 매 학기가 시작되기 전마다 그랬다. 매번 대출금과 대학의 가치를 고민했지만 그만둘 용기가 없어서 결국 졸업했다. 대학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계속해서 /나는 빚쟁이구나/라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살았다. 사실이니까. 어느날은 에이, 까짓 거 갚으면 되지, 했다가도 또 어느 날은 그게 내 발목에 단단히 채워진 족쇄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매번 롤러코스터를 탔다.

저자가 계속해서 주장하는 금융상품으로서의 학자금 대출은 인지할 필요가 있다. 다만, 저자가 또한 계속해서 주장하는 등록금 인하와 대학 등록금에 대한 국가적 지원 더 나아가서는 제로 등록금이 실행되려면 선행돼야 할 것들이 많다. 지금 당장은 저것들이 실현된다고 해도 모두 다 같이 망하는 길로 가게 될지 모른다. 우선 대학의 수가 지금보다 현저히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부가 대학 등록금까지 원해줄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정치적 기반이 튼튼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모두 엉망이니까. 또 책의 초반에 대학이 대부분의 수입을 어디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다른 나라와 비교한 자료는 흥미로웠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던 건 일전에 읽었던 /봉고차 월든/을 보면 미국의 학비도 우리나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수입 비율에 대해서 표면적인 이해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미국 학생들의 채무 상황이 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지에 대한 부연 설명은 필요할 것 같다.

 

 

 

 

 

 

 

 

 

모든 요일의 기록

북라이프

김민철

 

 

 

 

 

 

 

 

 

 

[여행은 일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꿈꾸는 그곳은 이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지금,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곳에서도, 그때,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매일 먹는 바게트가 지겨울 테고, 대화할 상대가 없는 일상의 외로움에 몸서리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땐 그것이 또,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의무는, 지금, 이곳이다. 내 일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리하여 이 일상을 무화(無化)시켜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의무이다.]

 

 

[출근이 아무렇지도 않은 아침이라니. 출근은 내게 결코 화해 불가능한 어떤 것이었는데. 믿을 수 없게도 6년을 매일 회사를 가면서, 그 6년을 매일같이 나는 회사에 가기 싫었다. 막상 도착하면 또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할 거면서, 심지어 열심히 일할 거면서, 나는 매일 아침 출근이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출근이 아무렇지도 않은 아침이 찾아온 것이었다. 명백히 《시지프 신화》 때문이었다. 명백히 김화영과 카뮈의 짓이었다.]

 

 

[대학교 4학년. 한창 취업 원서를 써야 할 때, 모든 취업 원서에는 장래희망이랄까, 미래에 대한 포부랄까, 인생의 목표랄까 뭐 그런 걸 써내는 칸이 꼭 있었다. 당장 이 원서의 미래도 모르는데 '꿈, 희망, 포부, 미래' 같은 단어들은 늘 아득했다. 구체화되지도 않고, 상상조차 쉽지 않은 '미래'라는 거대란 시간 앞에 난 늘 길을 잃었다. 똑똑한 마케터, 성공한 영업사원 등이 정답인 것 같았고, 20대의 꿈이라면 모름지기 커리어우먼이랍시고 또각또각 비행기에 오르는 걸 꿈꿔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걸 감히 꿈이라 불러도 되나. 그건 그저 욕망이라 불러야 하는 것 아닐까.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나는 늙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략) 그러자 잘 늙고 싶다는 것도 꿈으로서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모든 취업 원서에 '잘 늙기'를 꿈으로 써냈다. 50군데 원서를 내고도 50군데에 다 떨어진 건 어쩌면 그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응. 이상하지? 그림도 못 그리는 주제에. 너무 못 그려서 초급반만 세 번이나 들었어. 그래도 세 번이나 들었으니까 나는 초급반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지."]

 

 

[읽고, 듣고, 보고, 경험하고, 지금까지 말한 그 모든 행위가 마지막에 '쓰다'에 도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점일지도 모른다. 나는 읽고서 쓰고, 보고서 쓰고, 듣고서 쓰고, 경험하고서 쓴다. 뛰어난 문장가도 아니면서, 그럴듯한 시나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쓴다. 아무도 못 보는 곳에도 쓰고, 모두가 보는 곳에도 쓴다. 쓰고서야 이해한다. 방금 흘린 눈물이 무엇이었는지, 방금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왜 분노했는지, 왜 힘들었는지, 왜 그때 그 사람은 그랬는지, 왜 그때 나는 그랬는지. 쓰고 나서야 희뿌연 사태는 또렷해진다. 그제야 그 모든 것들을 막연하게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쓰지 않을래야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잘 쓰기 위해 좋은 토양을 가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 살아야 잘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쓰다'와 '살다'는 내게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나는 이 문장 속에서도 언제나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행이다'라고 쓸 수 있어 진실로 다행이다.]

 

 

 

*

 

 

신간은 여행에 대한 기록이었지만 여행 에세이는 읽고 싶지 않아 굳이 예전에 낸 책을 샀다. 신기했다. '쓴다'는 행위에 이토록 애정을 갖는다는 것이. 그녀는 책에서 내내 자신은 어떤 일이 이해가 돼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카피 한 줄을 쓸 때도 전제 중 단 하나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한 단어도 쓸 수 없다고. 그래서인가, 생각했다. 그녀에게 쓴다는 건 세상에 대한 이해와 납득이 전제된 것이니까.

 

책을 다 읽고 났을 땐 꼭 포도알을 선물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유려하지 않은 문장으로도 공감을 야기할 수 있구나, 싶었다. 특히 자소서 칸에 있는 장래희망에 대한 이야기와 무언가에 대해 쓰고 나서야 그 무언가가 명확해진다는 부분이 특히 공감돼서 기록해 둔다.

 

 

 

 

 

 

 

 

 

수레바퀴 아래서

문학동네

헤르만 헤세

 

 

 

 

 

 

 

 

한스에겐 스스로 생각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어른들로부터 주입된 경쟁과 성공의 가치가 한스를 지배했다. 처음엔 이에 눌렀던 한스도 점점 그것이 주는 성취에 도취돼 자신의 생각 갖기를 포기한 듯 보였다. 그렇게 사는 삶이 나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누리게 해 줄 삶인 것 같았으니까. 그러다 신학교에서 만난 친구 때문에 어른들로부터 주입된 가치를 부정하게 되고, 그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게 사라지자 한스는 텅 빈 상태가 되고 만다. 집으로 강제 송치돼 눈뜨게 된 노동과 이성의 세계가 한스를 채워가는 듯 싶었으나, 이성의 세계는 그를 충족시키기도 전에 떠나버렸고 노동의 세계는 그에게 남아 있던 이전의 가치관과 충돌해 그를 파멸에 이르게 했다. 그는 다시 텅 빈 상태가 됐다. 그리고 존재 자체가 비어버렸다.

 

 

 

 

 

 

 

 

이만큼 가까이

창비

정세랑

 

 

 

 

 

 

 

 

 

 

 

 

 

[다행히 고등학교 때 찬겸이는 살이 빠졌고, 머리를 길렀고, 전보다는 놀림을 덜 받기 시작했다. 한번 연습을 해서인지 수능은 잘 봐서 치대에 입학했고 점점 더 스키니해지더니 라식 수술까지 해서 지금은 동네의 대표적 훈남이자 마스코트 '개천 용'이다. 딸 가진 엄마들은 "너 그때 걔 좀 미리 알아보지 그랬어!" 하며 닦달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찬겸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냥 돌아보면 항상 있는 분홍 생물체 같은 느낌이었다.(pp.23-24)]

 

 

[폴과 린다, 두사람은 연결되어 있었다. 눈에서 눈으로 사슬 같은 게 매달리지 않았나 싶게 이어져 있었다. 사랑스럽다면 사랑스럽고 끔찍하다면 끔찍할 정도의 연결선이었다. 폴 매카트니가 카메라 이쪽의 린다를 볼 때에, 지금의 우리까지 덜컹할 정도라면 실제로는 더했을 것이다. 린다와 폴이 아직 사랑에 빠지기 전의 사진들만 봐도 뒤의 일들을 예감할 수밖에 없다. 렌즈도 존재하지 않고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찍은 지 삼십년, 사십년이 된 사진들인데도 그 모든 감정들이 훼손되지 않았다.(p.41)]

 

 

[결국 크면 대단한 게 되는 게 아니라 애초에 하던 걸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 거구나 싶다.(p.44)]

 

 

[감독들은 어쩔 수 없이 시각적인 동물이라 내가 괜찮은 소품을 얻어가면 갑자기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조그만 알전구들이 달린 회전목마 오르골이나 잘못했다간 살갗이 까지는 녹 비늘 일어난 철제 침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게 영화에서 클로즈업되고 오래 찍히면, 종종 평론가들이 그걸 보고 감독의 정신세계를 분석했다. 그냥 소품 담당이 럭키했던 거예요, 윙크를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p.62)]

 

 

[귀가 뜨거워진 날은 후드를 쓰고 잤다.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머릿속의 따뜻한 공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p.83)]

 

 

[좋은 어른은 좀처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나쁜 어른은 내세울 권위가 없다. 그러므로 권위에 있어서는 지금 거론되는 권위가 진짜인지 아닌지 자주 따져봐야 할 일이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어른을, 감독을 무서워하지 않았다.(p.89)]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은 많은 것을 배우지만, 모두 결국은 거절당하는 법을 배운다. 예쁜 여자애에게 거절당하기도 하고 공부에 당하기도 하고 재능과 미래에 당하기도 하고......(p.96)]

 

 

["왜 아무 말도 안해?"

 "글쎄, 내 친구들이 아니니까?"

그 거리감이 괜히 좋았다. 나머지 애들은 주완이의 친구가 아니다. 나만 주완이의 친구다. 친구보다 더 친밀한 어떤 것이다. 이만큼 가까워, 우리는. 여자친구보다도 더 친밀한 어떤 것이 어느날엔가는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다보면 분리가 불가능한 사이가 될 거라고, 나는 주완이의 곁에 캐주얼하게 앉아 음험하고도 창대한 계획을 세웠다.(p.98)]

 

 

[나 (내레이션) 정말로 놀라운 건, 종종 내 친구들과 똑같은 얼굴의 아이들과 마주친다는 것이다. 친척도 아니고 아무도 아니다. 아무 관계도 없이 그렇게나 똑같은 얼굴로 태어난다. 누군가 이 세계에 우리와 똑같은 얼굴들을 계속 채워넣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두려운 것은 그 똑같은 얼굴 뒤의 거의 다르지 않을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유일하지도 않으며 소중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대체된다. 모두가 그 사실에 치를 떨면서.(p.105-106)]

 

 

["노동자와 여성과 모든 소수자들의 편에 서겠다는 건 완전히 동의하는데, 왜 난 함께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애정이 안 생기지? 왜 그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게 싫을까. 왜 폭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폭력적이냐는 말이야."(p.155)]

 

 

[필립은 특히 나를 위해 뉴욕의 미술관들이 지금 무슨 전시를 하고 있네, 첼시 갤러리들 중 어디가 요즘 가장 핫하네, 미술가 누가 요즘 뜨네, 열심히 설명해줬다. 그럴 때면 어째선지 중요한 모든 일은 거기에서만 일어나고 여기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같이 느껴졌다. 필립의 잘못은 아니었다.

송이와 필립의 아파트에 머물며 뉴욕을 걸어다녔을 때에도 늘 그런 느낌이 들었다. 모든 일들이 여기서 일어나고 그에 비하면 세계의 나머지는 공백 비슷한 거누나. 서울은, 한국은 멀리서 보면 세계의 파주 비슷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빛나는 도시에 꽤 가까우면서도 어찌해도 메인 무대는 아닌 어정쩡한 땅 말이다.(p.206)]

 

 

["사전이 서로 경쟁하면서 증식하는 것도, 이제는 웹상의 거대한 데이터 덩어리가 된 것도 신기해. 모든 게 다 들어 있는데 순수해. 그러기 쉽지 않잖아."(p.218)]

 

 

["그런데 어느새부턴가 너무 소모적인 일이 되어버렸어. 책이 안 팔리기 시작하면서 사람은 덜 뽑고 그 적은 사람들이 기계처럼 일하게 되었어. 그렇게 기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너희가 무슨 예술가냐, 시비 거는 사람들도 많은데 예술가는 아니지만 장인이라고는 생각하거든. 장인에게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는 공을 들일 여유가 필요하고 말야. 그런 게 불가능하도록 노동강도는 무리하게 걸리는데 환경은 점점 나빠지고."(p.221)]

 

 

["내 생각에, 별로 좋은 나이라는 건 없는 것 같아. 어릴 때는 언제 어디에 있고 싶어도 결정권이 없고, 나이가 들면 지금이 언제인지 어디에 있는지 파악을 못하니까."(p.242)]

 

 

 

*

 

 

 

  이 책을 소개하는 문구들엔 /명랑한 목소리로 학창 시절의 트라우마를 다독이다/ 류의 것들이 필수 요소인 마냥 들어가 있다. 맞지만. 그보다는 인물들의 직업이 뚜렷하고 그에 의거한 얘기들로 과거와 현재의 일들을 본다는 게 좋았다. 얼마 전에 갔던 제작발표회에서 이규한 씨가 "드라마에는 하나의 이야기에 담기에 너무 많은 커플이 나오는데 그들을 모두 다른 캐릭터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장과 직업 내에서 보여줄 수 있는 연결고리와 상황인 것 같다"고 했던 말에 동의한다. 책에서도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신형철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은 뒤론 /인물을 쌓아올리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는 어떤 인물이 어떻게 설득력을 갖나, 하는. 그런 거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매력적이었고, 막힘 없이 읽혔다. 작가의 문체가 발랄한 것도 한 몫 했고, 마치 영화쪽 일을 하는 주인공이 이야기들을 씬으로 풀어 단편적으로 보여준 뒤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듯한 그런 방식도 좋았다. 장편을 읽는 건 굉장히 오랜만인데 무척 좋은 책이라 기분이 좋다. 죽음이 찾아온 대목에서는 정말이지 목이 콱 막혔지만 전반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발랄한 문체들 덕분에 읽는 내내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 그리고 읽는 내내. P언니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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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예술

민음사

심보선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순수한 예술, 자율적 예술, 천재라 불리는 예외적 개인의 예술, 지상에 떨어진 타락한 천사의 예술, 진리를 선포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선지자적 예술죽었다.(p.14) 대신 그는 예술이 지난한 우리 삶 곳곳에서 살아날 것이라고 하며 그것을 그을린 예술이라 지칭했다. 이 책은 그가 행한 혹은 찾아낸 그을린 예술에 관한 기록이다.

 

  특히 좋았던 기록은 <2부 예술과 공동체> 두리반, 자립 의지의 거점이었다. 두리반은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소설가 유채림과 부인 안종녀가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운영하는 칼국수 보쌈 전문집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9년 거대 자본에 의해 두리반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부부는 두리반을 지키기 위해 531일의 농성을 이어 갔다. 두리반의 부부 이야기가 일반 철거민의 이야기와 달라지는 것은 이 부근 소설가 유채림이 소설가의 방식으로 농성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문에 아내의 우물 두리반이란 칼럼을 썼고 이걸 본 인디밴드가 찾아와 두리반에서 공연을 하겠다고 했다. 두리반에 음악이 깃드는 순간 두리반이란 폐허에 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밴드의 공연을 보러 왔다가 두리반과 지속적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홍대 인디 레이블이란 또 하나의 자본에 속하지 못한 인디 밴드들은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을 형성했다. 음악뿐 아니라 영화 상영 프로그램이 있었고, 문학 작가들의 낭독회가 있었고, 그 외에도 연극 공연, 디자이너들의 두리반 외관 디자인 작업 등 모든 예술 장르들이 두리반에 집결하였다.(p.112) 두리반에서 행해진 문학 낭독회는 초반엔 작가들 위주였으나 낭독의 장은 두리반에 온 모든 이들에게 열렸다. 결국 이들은 거대 자본에 맞서 두리반을 지켜냈다.

 

  그을린 예술이란 그저 자신이 창작의 기쁨에 휩싸여 하게 되는 예술이다. 또 삶을 지키고 살아내기 위한 수단이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을음으로 빛나길.

 

 

 

 

 

 

 

 

 

경제쇼

왕의서재

김광수경제연구소

 

 

 

 

 

 

 

 

 

 

 

 

 

<01 예견된 전.월세 대란, 동문서답하는 대책>

 

[생활 필수 공간인 집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재산 증식을 위한 재테크 투기 수단으로 삼는 나라는 온전한 성장을 할 리가 없다. 이미 일본과 미국이 부동산 투기 거품 붕괴로 장기침체에 빠졌고, 유럽도 부동산 투기 거품이 붕괴하면서 심각한 경기침체가 6년째 계속되고 있다. 부동산 투기 거품 붕괴는 경기 침체뿐만 아니라 천문학적인 부실과 빚을 남기게 된다. 한국의 가계부채 문제가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이제 잘못된 주택 개념을 바꾸고 부동산 시장 상황에 적합한 주택 정책이 정립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월세를 사는 무주택자가 전체 가구의 절반에 달한다. 연령대별로 보면 50~60대 이상 부모 세대 20퍼센트가량이 전체 주택의 70퍼센트 정도를 소유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주택을 여러 채씩 소유하고 있다. 재산 증식과 노후를 대비하고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생각으로 투자한 것이다. 반면 30~40대 자식 세대 태반은 집이 없어 전.월세를 산다. 빚을 낼 수 없어서 하우스푸어조차 되지 못한 세대다. 부모 세대가 집을 여러 채 가지고서 비싼 전.월세를 주면서 젊은 자식 세대가 죽으라고 일해서 번 몇 푼 안 되는 월급을 착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 보니 젊은 자식 세대가 결혼을 포기하거나, 결혼해도 애를 안 낳는 심각한 저출산 현상을 초래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현상에 가속도가 붙었다. 대한민국의 대가 끊기기 일보 직전까지 간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거의 필연적으로 4~5년 후에는 한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정치원이 정신 차리고 젊은 무주택자를 위해 저렴하고 양질의 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해야 한다. 빚내서도 사기 어려운 분양주택이 아니라, 자기 소득으로 감당할 수 있는 공공 임대주택을 공급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렇게 간단한 정책이 추진되지 못한 까닭은 상당수 정치권과 정부 관료들 자신이 주택 투기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인사청문회에서 여야를 불문하고 부동산 투기 혐의에 걸리지 않은 고위 공무원과 장관 후보자를 본 기억이 없다. 정치권 비자금과 관련하여 건설업계가 연루되지 않은 경우도 거의 없다. 그들 자신이 주택이나 상가 등을 소유하면서 전.월세를 받아 소득을 챙겨야 하니까 공공 임대주택을 적극 공급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서민들은 아무리 발버둥치고 노력해도 자기 힘으로는 살 집조차 마련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기득권 지키기와 이기심이 한국 경제를 위기로 내몰았다.]

 

 

 

<03 실업률 2퍼센트대, 체감은 20퍼센트>

 

[생활이 어려워 은퇴를 미루고 저임금의 비정규직이나 자영업 등의 일자리라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고령 세대 때문에 양적인 면에서 실업률 수치가 낮아진다. 청년 세대와 고령 세대 모두가 실제 체감하는 고용 상황이 너무 안 좋다고 느끼는 데는 이런 속사정이 있다. 말하자면 실업률 2.9퍼센트는 착시현상일 뿐이다. 노인 세대의 일자리 유지가 양적인 면에서 실업률 수치를 낮춰줘 그저 경제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실업률보다는 '취업률'이 경제 전체의 고용사정을 정확히 반영하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취업률이란 만 15세 이상 인구 중에서 몇 퍼센트가 실제 취업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지표다. 한국 경제 전체로 보면 이 취업률은 거의 개선되지 않고 있다.

그런가 하면 경제에서 고용은 일자리 숫자처럼 양적인 면의 증대뿐만 아니라 임금 수준처럼 질적 측면도 무척 중요한 요소다. 높은 임금의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비정규직이나 자영업 같은 낮은 임금의 나쁜 일자리가 늘어난다면 국민이 체감하는 고용시장 사정은 악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높은 임금의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은 한국 경제 전체로 보아 생산성 향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뜻인데, 이는 한국 경제의 질적인 경쟁력이 퇴보하고 있다는 암물한 뉴스다.]

 

 

 

<04 전력난을 부르는 희한한 차별>

 

[시장경제 원칙으로는 기업의 전기요금을 가장 비싸게 하는 것이 맞다. 전기를 많이 쓰는 곳일수록 요금을 비싸게 책정하는 이른바 '수익자 부담원칙'이 기본이다. 시장경제 원칙이 적용됐을 때 이와 관려한 기술이 발전하는 법이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까지 에너지 절약 기술 개발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한국 기업들의 최대 취약점 중 하나가 에너지 관련 기술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전력난 문제는 실상 복잡하지 않다. 가정용 전기요금과 산업용 전기요금을 현실에 맞게 조정하면 된다. 해결할 의지가 없는 것이 문제다. 정치권이나 정부는 기업과 직접 이해관계가 맞닿아있다. 자기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고, 정치자금을 줄 수 있는 곳이 기업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국민이나 소비자, 유권자보다는 정치권과 직접 이해 당사자 관계에 있는 이익집단에 유리하게 법이 제정되어왔다. 전기요금 문제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전기요금이 3차례 연속으로 올라 5년간 약 15퍼센트 정도가 올랐다. 산업용 전기요금도 가정용보다 상대적으로 더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가정용보다 산업용 전기요금이 월등히 낮다. 하루빨리 개선할 부분이다.]

 

 

 

<09 세금 문제 절대 불변의 법칙>

 

[선진국들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세금을 어떻게 운용하고 있을까? 미국이든 일본이든 유럽이든 선진국들을 보면 다들 빚투성이다. 선진국조차 조세 정책을 매우 잘못해왔다는 증거다. 세금을 적절하게 걷지 못한 채 무분별하게 써왔으니 빚투성이 정부가 된 것이다.

정치권에서 종종 한국의 세율이 선진국보다 낮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니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논리는 이렇게 등장한다. 더 많이 걷은 세금으로 복지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선진국과 한국은 소득분배 구조가 무척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 미국, 일본의 소득분배 구조를 부면, 가계의 노동소득분배율이 한국은 53퍼센트인 반변 미국은 63퍼센트이고, 일본은 72퍼센트에 달한다. 한국 경제에서는 사람들이 노력해서 창출한 부가가치 중에서 53퍼센트를 임금으로 분배해주는 데 비해 미국 경제에서는 63퍼센트를 분배해주고 일본 경제에서는 72퍼센트를 분배해준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 경제는 노동에 대한 소득분배율이 매우 낮다.

반면, 기업에 돌아가는 분배율인 자본소득분배율은 한국이 무려 33퍼센트에 달한다. 미국은 24퍼센트, 일본은 19퍼센트에 불과하다. 이 수치는 한국에서 경제활동으로 얻은 부가가치 중 임금으로 주는 비중이 작고, 기업이 가져가는 몫이 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소득분배 구조에 맞는 조세체계를 만들어야지, 수치만 놓고 미국 세율이 이렇고 일본 세율은 저렇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다. 조세 개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가계에 돌아가는 노동소득분배율을 미국이나 일본처럼 높아지도록 경제 구조를 바꾸는 개혁이다. 가계소득이 높아지면 세금을 쏟아붓는 복지 문제는 저절로 해결할 수 있다.]

 

 

 

<15 빼앗긴 골목, 자영업자의 몰락>

 

[언론에서는 자영업자 문제를 다룰 때 주변의 대형업ㅊ, 할인점, SSM 등 중소 규모의 자본력 있는 대기업만을 문제로 삼는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것들보다 더 큰 문제는 자영업자끼리 제살 깎아 먹기 경쟁이다. 소매업종을 제외한 대다수 업종의 경쟁상대는 동종 소형 자영업자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대형업체만 규제하는 것은 헛다리 짚는 격이다.]

 

 

 

<23 백약이 무효한 부동산 대책>

 

[정부가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효과가 없는 이유는 지금까지 사람들 대부분이 재테크 차원으로 부동산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즉, 시세차익을 얻기 위해 빚내서 무리하게 부동산 투자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수요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치명적이었다. 쉽게 말해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 것은 투기적 가수요 때문인데, 투기세력과 가계부채가 한계에 이르고 보니 이미 올라버릴 대로 오른 가격이 더는 떠받쳐질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수요와 공급은 무너지고 가계 빚은 너무 많아져 추가로 부동산 시장을 받쳐줄 소득 계층이 소진된 상태다. 주로 30~40대가 신규 주택 수요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 주택 가격이 그들 소득으로는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 설상가상, 빚을 내 폭등하는 가격을 떠받쳐 왔는데 이제는 그 빚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주택가격을 떠받쳐줄 신교 수요는 사실상 사라졌다. 결국 정부가 나서 부동산 시장에 직접 돈을 쏟아 부어 어떻게든 주택시장을 떠받치려고 하지만, 한계에 봉착한 시장은 꼼짝도 안 한다. 게다가 2011년 하반기부터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주택가격 하락 압력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과다 가계부채를 해결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부동산 가격을 신규 수요층인 30~40대의 소득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리든지 하는 근본 대책이 아니면 거래 활성화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니 정부가 쏟아내는 부동산 부양책이 모두 미봉책 아니면 공염불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27 한미 FTA의 의도된 침묵>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자유무역 확대로 국제 분업이 강화되면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 한국에서 양극화가 심화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한국에서 FTA를 하기 전에 농업이나 서비스 자영업을 했던 사람들이 자유무역 이후 경쟁력이 없어져 더는 지속하기 힘들어지는 반면, 반도체나 자동차를 수출하는 대기업은 비교적 이득을 보는 것이다. 농업이나 서비스 자영업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기들 생존이 걸린 만큼 강력하게 반발할 게 불 보듯 뻔하다. 한미 FTA는 반발이 예상되는 한쪽을 강제로 억누르고, 일방적으로 수출 대기업 입장만을 앞세워 추진된 측면이 있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한미 FTA 같은 거대 이벤트를 추진할 땐 피해 보는 산업이나 사람들에게 충분한 대책을 먼저 마련해줘야 한다. 그 후에 차근차근 진행해도 늦지 않다.

정부와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이 갈등의 소지를 미리 방지하고 대책을 세우는 일 아닌가. 거꾸로 정부가 국익이 우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면 이는 직무를 유기한 꼴이 된다. 과연 누구를 위한 국익이냐는 질문에 정부가 대답할 수 있을까.]

 

 

 

<34 복지에 가려진 경제학 제1 원칙>

 

[그런데 한국에서는 기가 막힐 말들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다. 복지가 경제 성장을 이끈다고 떠들어대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복지는 경제 시스템을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한 뒤, 그 시스템 안에서 경제 활동을 하고 능력이 되고 여유가 있는 사람한테 세금을 걷어 자기 삶을 책임질 수 없는 사람에게 지원해주는 것이다.

공동체에 가장 좋은 방향은 경제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만들어놓고 가능하면 모든 사람이 경제에 참여해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자생력을 최대한 높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현명함이란 경제 참여자들의 자생력을 최대로 높여주고 만약 거기서도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 생겨나면 공동체가 이들을 공동 부담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 시스템을 엉망으로 만들어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사람들을 양산해놓고서 이제 와 복지를 주장한다면 주객이 전도된 이야기일 뿐이다. 가장 급한 건 시장경제를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35 동네 빵집이 살아남는 한 가지>

 

[지배구조 건전화가 급선무임에도 재벌 총수에게 조금이라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때마다 재벌들이 한국에서는 기업을 못 해먹겠다는 식으로 말한다. 솔직히 한국에서 기업 못 하겠다면 차라리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가서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전 세계에서 재벌이 이토록 엄청난 특혜와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나라는 거의 한국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미국을 가든, 유럽을 가든, 하다못해 중국에서도, 재벌 대기업들이 한국에서와 같은 특권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각종 조세 감면 제도, 낮은 실효세율, 일감 몰아주기, 불공정 거래와 편법 증여, 유.무형의 수출 보조금 등 중소기업에 비교하면 재벌 대기업에 집중된 특혜는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마음사전

마음산책

김소연

 

 

 

 

 

 

 

 

 

 

 

 

 

<1 오직 마음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

 

[차 한 잔과 담배 한 모금 ; 밥은 사람의 육체에게 주는 음식이라면, 차茶는 사람의 마음에게 주는 음식이다. 밥보다 차를 더 즐기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마음이 발달한 사람이다. 밥 한 그릇이 육체에게 에너지를 준다면 차 한 잔은 마음에게 에너지를 준다. 일하는 막간에 차 한 잔을 마시는 휴식의 시간은 마음을 쉬게 하고 그럼으로써 육체를 돌보게 해준다.

 

찻집에서 차 한 잔을 함께 마시지 않고, 식당에서 밥만 먹고 헤어지는 관계에는 온기가 없다. 식당만큼이나 찻집이 많은 우리가 사는 동네를 산책하면서, 마음이 만나는 것이 적어도 육체가 만나는 것만큼은 소중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찻집의 간판을 보라. 식당의 간판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다는 명시성을 추구하고 있지만, 찻집의 간판은 여전히 아름다움 쪽을 향해 있다. 눈보다는 마음을 끌기 위해서.

 

담배는 건강에 해롭다. 백해무익하다는 담배이지만, 그것은 육체의 관점에서만 보았을 때 가능한 이야기이고, 애연가들에게 담배는 정신 건강에 이롭다. 몸보다 정신의 건강을 우위에 두는 사람이라면 담배가 몸을 해치는 것을 알고도 담배를 계속 손에 들게 될 것이다. 한숨과도 같은 담배 한 모금을 내뿜으며 사람들은 마음을 환기하고 쇄신할 수 있다. 덩 샤오핑에게 사람들이 장수의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끽연'이 그 비결이라고 말했다 한다. 만끽한다는 것만큼 지혜로운 건강법은 없다.

 

뜨거운 물에 차 알갱이가 풀려나가고, 담배 한 모금의 연기가 허공에 풀려나갔다. 그 풀려나가는 실체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마음의 매듭을 푼다. 찻물을 끓일 때에도 담배를 피워 물 때에도 불이 필요하다. 차와 담배는 온도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커피를 볶을 때에도 녹차 잎을 말릴 때에도 열기가 필요하고, 담배를 피울 때에도 점화가 필용하듯이, 마음에도 열기와 점화가 필요하다. 냉정함이 열정의 한 방법이듯이, 냉정해지는 것에도 온기 있던 한때가 전제된다. 차 한 잔과 담배 한 모금을 음미할 때처럼.]

 

 

 

<2 마음에 존재하는 감각들>

 

[잔상 ; 방금 보던 것이 보일 때가 있다. 지금 보고 있는 것 위에, 겹쳐서. 언제나 두 개의 당신을 견딘다. 당신이었던 당신과 당신인 당신을. 잔상이 없이는 당신은 내 안에 살아 있지 않다. 내가 보아왔던 당신이 지금의 당신 뒤에 없었다면 나는 당신을 박제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잔상의 원리를 적용한 영화의 화면처럼, 당신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기쁨은, 당신이 내게 선물처럼 남겨주었던 잔상의 열매들 때문에 가능하다.]

 

 

 

<4 감정의 태초들>

 

[죄책감 ; 죄책감은 한 집단의 질서를 관장한다. 가장 인간적인 호소를 하며 집단의 질서를 창출한다. 규칙이나 약속을 어기거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에 우리의 죄책감은 찾아온다. 작가는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할 때에 죄책감을 느끼며, 도둑은 훔치려고 한 물건을 훔쳐내지 못하고 주저할 때 죄책감을 느낀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더 깊은 죄책감에 빠졌을 것이다. 창밖에 퍼붓던 장마에 '이 비로 세상이 잠겼으면' 하는 과대망상에 잠긴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고 나자 정말로 방방곡곡에서 홍수가 일어나 수재민들의 비참함이 뉴스에 보도된다면 꺼림직한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올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한가한 어느 시간에, 눈물과 한숨을 동반한 죄책감이 불쑥 찾아올 때도 있다. 아이였을 때에는 괜스레 부모에 대한 죄책감을 들곤 하며, 어른이 된 이후에는 인간이라는 그 사실에 죄책감이 들곤 한다. 이것은 나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하여 고마움보다 미안함이 더 커질 때에 생기는 일차적인 감정인데, 적어도 덜 미안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종의 노력을 기울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뼈저린 죄책감을 경험한 후에 인간은 진화된다. 아이였을 때 사랑하던 강아지가 죽었던 경험으로 생명에 대한 애착을 깨달으며, 어른이 된 후에는 부모와 사별한 후에 죄책감을 뼈저리게 느끼고는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다.]

 

 

<5 작은 차이가 빚는 전혀 다른 결론>

 

[행복:기쁨 ; 행복은 스며들지만, 기쁨은 달려든다. 행복은 자잘한 알갱이들로 차곡차곡 채워진 상태이지만, 기쁨은 커다란 알갱이들로 후두둑 채워진 상태다. 기쁨은 전염성이 강하지만, 행복은 전염되기 힘들다. 남의 기쁨에는 쉽게 동조되지만, 남의 행복에는 그렇지가 않다. 약간의 질투와 약간의 모호성. 그것이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남에게서 전염된 기쁨은 그러나 오래가지도 않고 자기 것이 되지도 않는다. 금세 잊는다. 그렇지만, 남에게서 전염된 행복은 오래가기도 하거니와 자기 것이 된다. 그만큼 느리고 꼼꼼하게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얻은 기쁨과 행복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그렇지만, 빠르고 간단한 것들은 느리고 꼼꼼한 것만 못하다.]

 

 

[정성:성의 ; 정성에는 의도가 없지만 성의에는 의도가 있다. 정성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지극함이지만, 성의는 예를 갖추기 위한 노력의 결과다. 그래서 정성은 '담겨 있다'고 말해지고 성의는 '표시한다'고 말해진다. 정성 어린 선물은 하는 사람도 받는 살마도 판단하지 않는다. 그냥 주고 받는다. 선물이라는 물건 자체보다 애정을 선물하는 것이다. 성의가 담긴 선물은 판단하게 만든다. 성의를 봐서라도 받는 사람이 무언가를 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요구가 있다. 정성은 내키지 않으면 결코 구현할 수 없는 것이고, 성의는 내키지 않아도 얼마든지 구현할 수가 있다.]

 

 

 

<8 다가갈까, 기다릴까, 지켜볼까>

 

[관계에 대해 눈을 뜨기 이전, 아주아주 어렸을 적에는, 주저 없이 누군가에게 다가갔던 기억이 있다. 좋으면 그냥 다가갔다. 아주 어린 날의 일이다. 산책 길에 만난 반가운 강아지라든가, 만져보고 싶은 물건을 향해서 주저 없었다. 손을 미리 쭈욱 뻗고 입을 벌려 웃으며 다가갔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 어떤 거부를 당했더라도 그 상처가 깊지 않았는지, 상처에 관해선 기억조차 없다. 기대하고 설레고 그래서 마음먹고 다가간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실망도 없었을 테고, 실망이 있었을지라도 짧았을 것이다. 다가갈 또 다른 것들이 세상에는 봄날의 꽃들처럼 만발했을 시절이었으므로.

 

언젠가부턴 다가가지 않고 기다리게 됐다. 내가 실망을 하게 될까 봐 다가가지 못했던 건 아니다. 다가가기엔 수줍음이 너무 컸다. 다만 수줍기 때문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마냥 기다리면서, 하염없이 해가 뜨고 별이 지는 풍경들 아래에서 그 풍경을 고스란히 앓았다. 기다리고 있어서 초조하거나 힘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기다린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그냥 그대로 실컷 앓았다. 이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눈치챌까 봐 오히려 걱정했다. 들키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들킨다는 게 더 쑥스러웠기에 그랬다. 소녀 시절은 그렇게 보냈다.

 

열정이 무엇인지, 정념이 무엇인지를 처음 알게 된 때에, 그러니까 관계에 대해 눈을 처음 뜨게 된 그때에는, 언제나 '다가갈까, 기다릴까'를 고민하게 됐다. 고민에 빠져서 내가 무엇을 향해 다가가려고 하는지마저 잠깐씩 잊을 정도였다. 그때는 고민이라는 말보다는 어쩌면 계산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관계에 대해, 꼭 원하는 것을 얻고 싶기에, 조심스러워서 하던 갈등이었기 때문이다.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꼭 잃을 것만 같아서 다가갔고, 다가갔다가는 꼭 상처를 입을 것만 같아서 기다렸다. 서성이느라 모든 날들이 피곤했다. 불 켜진 그 집 창문을 바라보거나, 텅 빈 그네에 앉아서 고민에 빠지거나, 우연을 가장하기 위해 꼭 만날 것만 같은 길목에서 불철주야 서성였다. 그 와중에서 행복에 빠지기도 했고 불행에 빠지기도 했다. 행복이거나 불행이거나 간에, 그 어디든 빠져서 허우적대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다가갈까 기다릴까를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게 됐다. 이것은 살아온 날들이 만든 현명한 태도이지만은 않다. 정념의 불꽃을 다스렸다는 절제 또한 아니다. 소중한 것들이 내 품에 들어왔던 기억, 그 기억에 대해 좋은 추억만을 갖고 있진 않기에, 거리를 두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일종의 비애인 셈이다. 나를 충족시키는 경우보다 결핍 그대로가 더 나은 경우를 경험해보았다. 그것은 나만을 생각했던 시절들을 지나와서 관계 자체를 배려하게 됐다는 뜻도 있지만, 그 배려에는 쓰디쓴 상처의 흔적들이 배어 있다. 지켜보고 있음이 꽤 오랫동안 변치 않는 은은한 기쁨을 선사해줄 거라는 패배 비슷한 믿음도 또한 있다. 그러므로 바라던 것이 나에게 도래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바라던 것들이 줄 허망함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은 '외면'이란 감정의 부축을 받으며.]

 

 

 

<9 '호감'에 대하여>

 

[동경 ; 존경과 유사한 상태이지만, 존경에 있는 것들이 부재한다. 존경은 이성적인 이유들을 각주처럼 거느린다면, 동경은 각주가 없다. 근거라는 것이 언제나 막연하고 미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존경이 다른 곳으로 쉽게 이동하지 않는 반면, 동경은 쉽게 이동한다. 단, 막막한 거리감이 늘 확보된다면 끝없이 붙박여 있을 수도 있다. 동경에는 또한, 존경보다는 좀 더 복합적인 욕망이, 그리고 흠모보다는 좀 더 나른한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

 

 

 

<11 말 ≤  거짓말>

 

[거짓말, 당신을 위하여 ; 거짓말이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행위라기보다는, 이토록 허망한 인생에 바쳐지는 봉헌 행위로 보여서 눈물겹고 고마울 때가 더러 있다. 더 거짓말에 속고 싶고 배부르고 싶어진다. 더 이상 속여주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더 이상 속아지지 않는 내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은 비애 그 자체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 속에는 '거짓말처럼 날이 개었습니다,'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다 나았습니다'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우리는 가장 좋은 순간을 믿기 어려워하고, 그렇기에 그 순간에 '거짓말처럼'이라는 수식어를 앞장세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두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을 두고 '거짓말처럼 아름다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12 유대감들>

 

[걱정 ; 걱정은 유대의 힘을 엄청나게 발휘한다. 같은 고민거리를 지닌 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도원결의한다. 해결책이 안 나오면 안 된다. 영원히 보류되는 해결책 아래에서 그 유대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언제나 모두가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먹히시 않는 해결책을 일찌감치 제시해버린 자들은 이 원탁토의 놀이에서 배제된다. 대한민국의 모든 주부들이 대동단결하여 바쁜 것은, 자녀 교육과 시댁 이야기와 저녁 반찬 걱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걱정은 속수무책이고 대한이 없고 영원히 지속된다.]

 

 

 

<23 무심함의 일곱 빛깔>

 

[이기적 무심함 ; 그는 오직 자신의 일에만 열중한다. 지구상에 희망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것을 통 알지 못해서, 지구가 멸망할 때도 하던 대로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

 

 

[작전상 무심함 ; 관계의 질량보존의 법칙을 믿고 적극 활용하려는 그는, 스스로가 무심해야 그쪽에서 관심을 드러내리란 계산을 철저히 하고 있다. 실은 아주 섬세히 모든 걸 관찰하지만, 모르는 척한다. 도무지 선물이라는 것을 건네지 않을 것 같은 그이지만, 그 관찰의 힘으로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사줄 수 있을 만큼 예리하다. 일부러 무심해 보이기 위해, 대화를 하면서도 창문 쪽을 응시하지만,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이며 자신의 표정과 헤어스타일 같은 것을 슬쩍 점검해본다, 잘 보이고 싶어서.]

 

 

 

<26 당신의 저쪽 손과 나의 이 손이>

 

[다행히도 우리는 찬연히 외롭다.]

 

 

 

<틈>

 

[미움 ; 사랑의 질 나쁜 상태.]

 

 

[슬픔 ; 생의 속옷]

 

 

[흥 ; 뼈와 뼈 사이에서 들리는 음악.]

 

 

 

  *

 

 

 

  시인이라면 응당. 혹여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개작을 할지라도. 이 정도의 사전은 정리해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요즘 내게 가장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시인이다.

 

 

 

 

 

 

 

 

 

 

 

아름다움은 힘이 세다

웅진지식하우스

피에로 페루치

윤소영

 

 

 

 

 

 

 

 

 

 

 

 

[소유욕에 대한 해결책은 미학적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만약 모든 길모퉁이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렇게 소유욕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름다움이 형태가 없고, 지속적이며, 일상생활의 무수히 많은 상황 속에서 머리를 내밀어 나를 놀라게 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형화는 현실의 축소판이다. 하나의 기준점으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인과 흑인, 여자와 노인, 비만인과 동성애자, 음악가와 변호사, 시어머니와 외아들에 대한 정형화된 기준점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이런 단어들을 듣기만 해도 정형성을 견고하게 하는, 정신적인 연상과 개념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인식의 환상을 심는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영국인이거나 이민자이거나 쇼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 사람을 자신이 만들어놓은 영국인이나 이민자나 쇼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포함시킨다. 그러고는 더 이상 그 사람이 얼마나 신비롭고 개성적인지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질문하지도 않고, 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그 사람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보지 않고, 그의 행동이나 목소리나 세계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정신적 수면 상태는 악몽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학살 사건의 밑바닥에는 바로 정형화된 사고가 존재한다. 민족이라는 정형화된 사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고 차별받았다. 정형화된 사고를 지닌 사람이 증오를 품게 되면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해서 결국에는 자신이 폭력의 수단이 되고 만다.

정형화는 종종 사회적 차별의 수단이 되고,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 표현하는 데 장애가 된다. 이는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중략)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형화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몰아가는 것은 좋아하면서 말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자신만의 빈약한 판본을 지닌다. 그것은 상투적으로 변해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비누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피사의 탑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기념품이 되기도 한다. 쇼팽의 <야상곡>은 전화 교환국의 신호음이 된다. (중략)

정형화되어 단순해지고, 진짜 동물의 세계와는 아무 상관없는 거위와 얼룩말, 코끼리와 코뿔소, 생쥐와 기린이 가득한 세상에서 아이들이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정말이지 위험하다.]

 

 

[때때로 우리는 자기만의 의식을 치른다. 그 의식은 한 소절의 음악이나 시가 될 수 있고, 어떤 장소나 한 권의 책일 수도 있다. 일상의 전쟁에서 상처 입고 돌아온 전사들처럼 우리는 이런 나만의 의식으로 돌아온다. 거기에는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아름다움은 완벽한 처방약이다. 다른 부수적인 효과는 없다. 아름다움의 효과는 오래 지속되고, 우리에게 전해지는 위안은 우리를 당황시키거나 위축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더 강하고 더 빛나게 한다. 그리고 인식의 수준도 더욱 높여준다.]

 

 

[아름다움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 쉽게 두 사람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별다른 수고 없이 그들을 가깝게 만든다. 어떻게 그런 힘을 갖게 되었을까? 아마도 아름다움을 알아봄으로써 우리의 마음도 열리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위장하지 않고, 사회적 지위를 뽐내지 않고, 어디서 배웠는지도 알 수 없는 이론 속으로 도망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만나면 우리는 무방비상태가 된다. 주변 세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던 장벽이 사라진다. 진실해진 우리는 세상에 그대로 노출된다. 이런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훨씬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인식할 때는 여러 조건들을 벗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 전문가들의 말, 유행하는 패션, 보기 흉해질까 하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우리는 좋아하는 것이 아주 가까이에 있음을 느끼고, 우리의 정체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한다.]

 

 

[미학적 지성은 미학적 중용, 즉 우리가 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누군가가 발견할 수 있음을 인정하게 한다. 이런 수용의 자세는 아주 중요하다. 아주 다양하고 놀라운 아름다움이 지닌, 진정한 특징들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숨어 있다. 항상 새롭고 매번 달라 보인다. 아무도 독점할 수 없는 대신 수많은 사람들이 소유한다.

미학적 중용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속물근성에 찌든, 편협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가진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천하고 저속하게 여기고, 진정한 아름다움의 주인은 바로 자신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그들은 우월감을 느낀다.

반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는 사람은 아름다움이 자신과는 동떨어진 것이라 여기고,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름다움이 있는 천국 밖에 있다. 그들은 소외된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자기 연민와 불행이 스며든다. 이 두 그룹은 서로가 서로를 부양하는 관계다. 소외된 자가 없으면 있는 자도 없고, 있는 자가 없으면 소외된 자도 없다. 두 그룹은 서로의 주변을 수없이 맴돈다.]

 

 

[도덕적 추함이 있다면 당연히 도덕적인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 아름다움은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아름다움은 복수심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잔인한 사람이나 사디스트,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나 악한 사람의 이야기를 싣는 것이 낫다. 그게 더 효과적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아름다움은 분명히 존재한다.

외적인 아름다움과 내적인 아름다움, 둘 다 존재한다. 외적인 아름다움이 더 명백하고, 시선을 끌기에 더 적합하고, 더 순간적이고, 유효기간이 더 짧다. 반면 내적인 아름다움은 더 예민하고, 인식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더 심오하다. 그리고 슬쩍 쳐다보는 것만으로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육체적인 아름다움은 단거리 선수와 같다. 짧은 거리를 항상 먼저 도착한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마라톤 선수다.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완주한다.]

 

 

[나와 인터뷰를 했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숨기거나 가장하거나 방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쉽게 발견한다고 했다.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똑똑한지, 얼마나 많이 아는지, 자격증을 얼마나 땄는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따위는 필요 없다. 그저 우리가 처한 어려움 속에서 꾸밈없이 자신의 결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내면의 아름다움이 드러날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

 

 

[나는 오래전에 심리치료가 사람을 낫게 하는 대신 오히려 더 초라하게 만들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내 환자를 우연히 길에서 보았다. 그는 항상 자신을 소심하고 약한 패배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던 그는 에너지가 넘치고, 강인하고, 빛이 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그의 고통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의 약한 부분만을 찾아 도와주려고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나는 그가 지닌 힘과 아름다움을 보려 하지 않았고, 그도 내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일이 매일매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성급함, 스트레스, 해야 할 일들, 어려움 등을 통해 우리는 가장 소박한 모습을 밖으로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속으로 이를 비난하고 판단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더 강해지고 정당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허상에 불과하다. 한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내와 신뢰가 필요하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보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더욱 간단해지고 행복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우리는 지금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다. 아름다움은 강하다. 세상을 움직여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구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약하다. 잊혀지거나 과소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관심 한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무시될 수도 있다. 그리고 삶은 일상적인 소외감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간다.]

 

 

[아름다움은 장애물을 없애준다. 아름다움을 방해하는 여러 생각들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내게는 아름다움이 별로 주용하지 않다', '시간 낭비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벅차다', '호사스러운 일이다', '아름다움을 생각할 능력이 없다' 등등....... 생각을 더 많이 할 것이 아니라 더 적게 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생각을 적게 해야 더 많은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다.

아름다움은 주의력을 키워준다. 우리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더 많이 섬세하게 말하게 한다. 우리의 관심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를 위축시킬 따름이다. 주의력은 어둠 속의 등대와 같다. 세상에 불을 비춰준다. 세상은 어둡고, 그 불을 켜는 사람은 바로 우리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찾는다. 아름다움에게 삶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아름다움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준다. 그러면 아름다움은 우리 안에서 커나갈 것이다.

아름다움은 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정확하지 않다. 그것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자전거를 배우면서 어떻게 균형을 잡는지 알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설명할까? 아름다움이 그렇다. 아름다움을 많이 접할수록 세상살이의 방향을 잘 잡을 수 있다.]

 

 

 

  *

 

 

 

  아름다움을 얼만큼 인지할 수 있는지는, 나를 얼만큼 열어 놓는지에 달려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막혀 있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리고 이는 결국 삶 전체의 시각 문제로 번지는 게 아닌가 싶다. 아름다움을 많이 인지할 수 있을수록 더 긍정의 세상을 볼 수 있다. 일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햇살이 손등에 내려 앉을 때의 아름다움을 알았다면,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 어제보다 하나 더 보였을 때의 아름다움을 알았다면, 그랬다면 그렇게 극단으로까지 치닫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름다움은 힘이 셀 뿐 아니라, 생존을 가능하게도 한다고 생각한다.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아름다움은 방금 언급한 것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다. 발견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많은 시간을 들여 봐 줄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순간,이 필요할 뿐이다. 아름다움은 어쩌면 긍정의 시각으로 치환할 수 있는 단어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정말. 생각보다 아름답다. 나도. 그리고 당신도.

 

 

 

 

 

 

 

 

 

 

 

 

그리움은 모두 북유럽에서 왔다

부즈펌

양정훈

 

 

 

 

 

 

 

 

 

 

 

 

<SWEDEN>

 

[나는 어른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많이 궁금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러더군요. 그건 이제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게 되는 거라고. 아직 내 하나 가슴도 건사하지 못하고 이렇게 버거운데, 그럼 나는 평생 어른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두려웠습니다. 한때는 이렇게도 생각을 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내가 꼭 대단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평범한 내 삶을 용서하게 되는 거라고. 하지만 지나보니 세상에 평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저마다 삶이 저렇게 눈부시고 선명한 것을요. 그러니 나는 다시 찾아야 하는가 봅니다. 어떻게 어른이 되어 안녕히 안녕히 살 수 있을까요?]

 

 

 

<ICELAND>

 

[그렇게 초밥을 뺏기고 커피를 뺏긴 대가로 그들 이야기를 묻는다. 별다른 이유도 없다. 여름이니까 밤새 벽에 그림을 그리러 영국에서 왔단다. 또 밤새 음악을 들으러 폴란드에서 왔단다. 돈은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도 단순 명쾌.

 

_괜찮아, 잠은 창고에서 자고 관광객들 술도 뺏어 먹지.

 

그러면서 유유하게 또 다른 누군가의 초밥, 커피를 향해 간다. 낮 동안 그림을 그리고 밤새 음악을 듣고 그렇게 한 여름을 백야의 나라에서 보내고는 또 어디론가 훌쩍 떠날, 사는 게 참 단순하고 만만한 괴짜들.

 

진짜다. 인생의 무게를 저 혼자 다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나 심각하고 복잡한 사람들이다. 제 속에 가진 자기가 아주 간단하면 다녀가는 비극과 희극을 다 데리고도 쿨쿨 잠을 자고 실컷 밥을 먹는 법이다. 단순한 괴짜들이 모인 여름의 레이캬비크. 나는 어쩌면 이렇게 인생이 만만한 사람들을 찾아 여기에 왔는지도 모른다.

 

가슴에 단 하나의 방만을 가지러.]

 

 

[저는 지금도 아주 가볍고 단출한 짐만 들고 사뿐사뿐 여행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면 몹시 부럽습니다. 그 짐이라는 게 사실은 줄이고 싶다고 줄여지는 게 아니거든요. 정확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 경험과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불필요한 걸 놓을 수 있는 작은 용기 같은 게 필요한 겁니다.]

 

 

[_젊은 것만큼 외로운 게 또 없지 뭐. 여행 조심히 하게.

 

마음에 불이 나곤 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열병이었다. 자꾸 되돌려 앓고 또 앓는 만성병이었다. 내게 힘이 있어 이 마음을 잘라내고 어디 깊은 물 아래로 버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은 결코 내 것이 아니었다. 섣불리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을 다 태워버리던 스무 살 때도. 함부로 사랑하지도 못하고 남은 사랑을 다 태워버리지도 못하는 서른 살 때도. 그러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는 내 마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 없었다. 남의 것이었다.

 

외로운 것은 사실 누가 곁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을 내가 가질 수 없기 때문이 아니던가. 사람들은 누군가 곁에 있어도 외로울 것이었다. 갖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라 제 하나의 마음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떤 방황이란 그 자신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방황을 정말로 위로하고 싶을 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이다. 단순히, 내가 다 알고 있다, 다 이해한다, 혹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 모두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위안이 되고 싶어도 함부로 당신의 방황을 말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만 이렇게 말하는 것.

 

당신이 당신의 최선을 다해 그 방황을 겪어내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당신은 초라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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