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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ERATURE

제주도에 갔다, 독서 모임을 하러

KNACKHEE 2020. 3. 8. 01:09

어딜 가나 문제인 건 마찬가지라 이왕이면 멀리 떠난, 뜨거운 생활 in 제주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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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문득 그동안 너무 많은 남의 인생을 생각하며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부분은 질투를 하고 부러워하느라. 그리고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볕이 너무 강렬해서 어제에 이어 다시 한 번 티를 더 챙겨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정말 자칫하면 옷을 사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너로 티에 니트가 아니라 티만 입는 걸 염두에 두고 짐을 챙겼어야 했다.

앱은 도착까지 2시간을 잡아줬는데 기사님이 엉덩이가 아프도록 달려준 덕분에 1시간 만에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로비의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 가져온 시집을 꺼냈다. 잠시 후 출장을 온 듯한 아저씨들이 우르르 몰려왔고 경상도 사투리를 잔뜩 써서 어쩐지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친구들이 자동문을 가르며 등장했다. 진짜 반갑더라고. 그리고 둘도 더워하는 게 보여서 보자마자 웃음이 났다.

 

프론트에 짐을 맡기고 D의 추천이었던 함덕으로 향했다. 한 번 환승을 해야 했는데, 나와 T는 타야 할 버스를 바로 뒤에 있었는데도 앱에서 알려주는 이 정류장은 도대체 어디인가,를 두고 헤맸다. 이 장면을 사진으로 포착한 M은 무척 즐거워했다. 이번 여행의 포인트 중 하나는 필름 카메라였다. M이 제안한 것이었고 T의 주도로 필름도 공구했다. 나는 필카가 좋으면서도 우려스러워 기어이 디카를 챙겼고 덕분에 여행 내내 어깨가 무거워 진이 빠졌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몸이 고생이지. 바다를 보자마자 셋 다 필카를 꺼내 셔터를 눌러댔고, 우리는 아마 나중에 현상해보면 셋 다 똑같은 사진만 가득할 거라며 키득댔다.

함덕의 바다는 난생 처음 보는 색이었다. 날씨가 좋은 것도 한 몫 했고. 짭쪼름하게 투명한 바다에 감탄하며 우리 중 가장 영상세대인 T는 동영상 촬영을 하기도 했는데 나와 M은 그것도 모르고 자꾸 목소리를 난입해 T를 절규하게 했다. 바다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한 포토스팟에서 무신사st로 포즈를 취하는 이들을 발견했고 우리는 뒤에서 야, 우리도- 무신사- 와- 하고 수군대며 그들의 스팟과 포즈를 탐냈다. 기다림 끝에 찍히는 사람은 민망하고 찍는 사람은 아주 즐거운 사진이 완성됐다. 몇몇 곳에서는 타인에게 부탁해 셋이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사내 산악회로 사장님(!)들과 소통하는 데 도가 튼 M이 큰 활약을 해줬다.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셋이 쪼르르 앉아 있다가 T가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을 발견했고 M은 그것의 가장 유력한 이유가 몸에 붙은 기생충들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는 정보를 찾아주기도 했다. 인상적인 장면과 인상적인 해석.

 

볕은 뜨겁고 바람은 조금 차서 계속 목도리를 풀었다 맸다 하면서 바닷바람을 맞다 보니 걸으며 풍경을 본 것이 전부인데도 진이 빠졌다. 무엇보다 카페인을 흡수하며 독서 모임을 진행할 카페가 절실했는데 찾아간 곳들은 맥락도 없이 문이 닫혀 있었고, 두 곳을 실패한 후에는 에너지를 아끼려 지도에서 인근 카페를 찾아 전화를 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의자에 털썩, 몸과 짐을 내려놓으며 여기는 목요일에 다들 문을 닫나요? 하고 물었더니 사장님은 친절하게 웃으며, 아, 거기 다들 좀 제멋대로예요, 하셨다. 오.

서른한 번째 뜨거운 생활이었고 이번 발제자였던 나는 <벌새>를 영화로도 책으로도 보고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던 차였다. 나는 대체로 원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것과 연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우리의 경험을 위주로 질문을 준비해가는 편인데, 몇몇 이야기들은 우리가 이미 나눴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배경으로 삼는 콘텐츠가 다르다 보니 같은 이야기를 조금 다른 각도로 해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낄낄) 작고 연약한 존재여야만 강하고 단단해질 기회가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훨씬 세밀하게 감각할 수 있는 감정이나 관계들이 있을 거다. 무엇보다 책에 수록된 글 중에 함부로 성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가서는 빠르게 챙겨온 수영복으로 환복하고 수영장에 갈 채비를 했다. 이번 여행의 주 목적 중 하나는 수영장이었다. T는 원래 수영을 즐겨 했고 M과  나는 각자의 이유로 사두고 한 번밖에 개시하지 못한 수영복을 활용하고 싶었다. 서넛의 숙소를 놓고 고민하다 이 숙소를 고른 것도 '수영장'이 가장 큰 이유였다. 수영모를 쓰고 나란히 거울 앞에 섰을 때는 정말 수치스러웠다. 누가 신경이나 쓰겠냐마는, ... 아니 내가 쓰지, 신경.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방학 때 수영 강습을 받고 주말마다 수영장에 갈 정도로 수영장을 좋아했는데 크면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수영을 즐기지 않게 됐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내 수영 실력을 가늠해보고 싶기도 했는데, 수영법을 잊지는 않았으나 체력의 문제로 세 번 팔을 휘적이면 숨이 찼다. 진짜 큰일이네. 전투적으로 수영을 하지 않으니 수영장에서 당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어성어성 서성서성 하다가 다 같이 온수풀에 들어가 이거지, 하며 노곤노곤해졌다.

저녁은 숙소에서 준 맛집 지도에 있는 돼지고기집. 고기 전문가 T가 인정한 맛집으로 등극했다. 나와 M은 T의 한라산을 야금야금 뺏어 소맥을 말아 먹었는데, 와, 기가 막히네. 맛있는 걸로 배를 채운 데다 알코올도 살짝 들어가고 나니 한껏 텐션이 높아졌다. 숙소에 가는 길에는 로또 1등을 배출한 로또 명당이 있어서 자동 번호에 운을 맡겨봤다. 토요일의 우리는 조금 더 즐거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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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M
PHOTO BY.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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