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Bossanova,

더 생각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본문

TEMPERATURE

더 생각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KNACKHEE 2020. 3. 8. 01:05

어딜 가나 문제인 건 마찬가지라 이왕이면 멀리 떠난, 뜨거운 생활 in 제주_01
_

3년 만이었다. '뜨거운 생활'이란 이름으로 독서모임을 빙자한 잡담회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그리고 같은 학교, 같은 과 동기로 만난 지 10년 만에 우리는 셋이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다. 작년 초에 내가 발제 주제로 '잘츠부르크'를 정하면서 기간을 정하고 돈을 모아 잘츠에 가자! 했으나 어쩐지 요원해졌고 일단은 국내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으로 가자, 하고 각자 이틀의 연차를 받았다.
그 사이 회사 업무로 제주도에 사는 저자와 계약을 진행할 일이 생겼고, 이왕이면 만나서 하면 좋으니까 상사에게 연차 동안 마침 제주도에 가게 되었으니 잠깐 만나고 올 수도 있겠다는 뉘앙스로 말을 흘렸다. 솔직히 다른 방법을 찾아주길 기대하면서 던진 말이었고, 그는 쉬는 동안 그런 거 할 생각 하지 말라며 블라블라 했다. 조금 만족스러웠는데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불러서는 비용 어쩌고 하면서 내가 제안했던 대로 하는 것도 좋겠단 식으로 말을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당황하지 않은 척, 혹시 출장계를 하루 앞에 붙여 쓸 수 있을지, 그렇다면 어차피 가는 거니까 미팅 시 차대 정도만 지원해주면 될 것 같다고 역제안을 했다. 딜!
출장 문제를 해결했나 싶었더니 다른 문제가 생겼다. 1월 초에 제주도 일정을 정하고 이후에 역병(...)이 돌아서 우리는 잠시 지역을 바꿔볼까도 고민했으나 어딜 가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M의 직장 동료가 '어딜 가나 문제면 이왕이면 멀리 가요'라는 명쾌한 조언을 했고, 우리는 무릎을 탁 치며 이를 덥썩 물었다. 이 작은 나라 안에서도 날씨가 너무 달라서, 짐을 싸기 전에 제주도에서 지내고 있는 D에게 '패딩입니까 코트입니까?' 하고 자문을 구했다. '패딩은 아니고, 코트에 목도리 챙기면 좋을 듯!' 하는 답이 돌아왔다.

D의 답변을 뜨거운 생활 친구들에게도 이미 공유한 상태였지만,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메시지를 남겼다. '아이들 패딩 안에 반팔 입을 거 아니면 패딩 아니야.' 볕부터 달랐다. 그 이후로도 체감되는 날씨를 계속 공유했는데 이게 낮에는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나고 밤이 되면 또 바람이 차고 해서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정말 도움 안 되겠네, 싶었다.
첫 날의 숙소는 저자가 사는 중문 쪽에 잡아놔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성을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제주에 올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관광지인데 왜 대중교통은 당최 편리해지지 않는 걸까. 버스의 TV에서는 대중교통이 아주 편리해졌다는 광고가 계속 나왔는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배차 간격은 여전히 너무 길고, 막차는 너무 빨리 끊긴다. 이동 외에 제주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것은 손목용 파스 구매였다. 정말 하루가 다르게 몸이 낡고 있다. 저자를 만나기로 한 '관광단지'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 아주 한산했다. 다른 지역의 관광단지들처럼 초반에만 반짝하고 사그라든 건가 싶었는데 저자는 시국이 시국인지라 관광이 제한돼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그에게 한국형 파이어FIRE라는 주제로 제안을 하면서도 스스로 납득되지 않는 지점이 있었는데 저자의 이 말 한 마디에 의문의 상당 부분이 해소됐다.
"누군가에게 행복한 순간을 물었을 때 비싼 소비의 순간을 꼽은 사람은 거의 없었거든요. 생각해보면 우리의 소비는 행복을 위한 게 아니라 불행을 지우기 위해서였던 게 아닐까 싶어요."

둘 다 늦지 않고 도착해서 정시에 만난 덕분에 미팅은 염두에 뒀던 여러 변수 중 가장 이른 시각에 끝이 났다. 미팅이 끝나는 시각을 보고 D를 만나기로 했는데 연락을 하니 D는 조금 일찍 움직여 이미 이곳에 와 있다고 했다. 통화를 한 지 십 분 정도 지났나. D가 모습을 드러냈고, 인천에서만 보던 그를 제주에서 만나니 반가움이 배가 됐다. 지난 가을엔가 태풍으로 비행기가 결항되는 바람에 잔뜩 기대했던 만남이 엎어진 후의 재회라 더 반가웠을지도. D의 손을 잡고 흔들며 걷다가 대뜸 나는 언제나 현금이 없고 너의 결혼식에 내고 싶은 축의금 금액이 있으니, 금액을 줄이고 커피머신으로 딜을 치자! 했다. 그는 마침 갖고 있던 것을 시어머니 숍에 갖다 놨다며 흔쾌히 딜을 받아들였다.
해가 저물 무렵에 바다가 보이는 펍에 앉아 페퍼로니 피자를 먹었다. 주문을 하며 둘이 한 판을 다 먹을 수 있을까, 했는데 세상 무용한 걱정이었다. D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로 만났다. 이후에는 띄엄띄엄 이어지는 만남을 지속하면서 만날 때마다 일상과 마음의 표피 정도를 이야기하며 한참 웃다 헤어지곤 했다. 해변에서 멀지 않은 내 숙소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그 많던 친구들은 다 어디 갔을까, 하는 의문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한 반에 40명씩 있는 학교를 12년이나 다녔는데.
데리러 온 남자친구의 차에 탄 D를 배웅하고는 편의점에서 과자를 잔뜩 사왔다. 평소에 보지 않는 TV를 틀어놓고 예능에 채널을 맞춘 후 과자를 먹는 데에 집중했다. 사실 내 돈 쓰고 오는 출장이어서 좀 꽁한 마음도 있었는데 막상 오니 자연이 아름다운 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하루가 생겼다는 게 선물처럼 느껴졌다. 공항에 도착한 순간 이미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면서 마음이 풀어졌기도 했고. 몇 박을 하는 여행을 갈 때마다 그 여행을 통해 무언가를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편이었는데, 이번 여행은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정말 오늘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도 침대에 누운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진짜 좋더라고.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고 느끼고 거기에서 그치는 거.

_


2020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