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Bossanova,

오름과 검은모래, 그리고 과자 본문

TEMPERATURE

오름과 검은모래, 그리고 과자

KNACKHEE 2020. 3. 8. 01:16

어딜 가나 문제인 건 마찬가지라 이왕이면 멀리 떠난, 뜨거운 생활 in 제주_03

_

 

 

 

자정에 새로운 뮤비가 공개됐고 내내 아, 덕후인 거 너무 힘들다! 덕후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하고 투덜거렸다. 아침에는 옆방의 소란함에 일찍 잠에서 깼고, 다시 잠들 수는 없었지만 침대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아침 이불 속 행복이라니. 바지런한 T는 나와 M이 이불 속에서 밍기적대는 동안 아침 수영을 다녀왔다. 내일도 T가 아침 수영을 가면 우리의 수영장 이용권을 알차게 쓸 수 있겠구나 싶어 괜히 좋았다.

T가 돌아오고 지난 밤에 사둔 샌드위치를 아침으로 먹었다. 정해둔 일정은 2시에 있는 수풍석 뮤지엄이 전부여서 오전에는 뭘 할까 하다가 D가 근처에 있는 수목원을 추천한 게 생각났다. T와 M은 선뜻 수목원이란 선택지에 V 체크를 해줬다. 사실 D에게 그 말을 들을 때만 해도 꼭 가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건 아니라 디테일한 정보를 물어두지 않은 상태였다. 대충 지도에서 가장 가까운 수목원을 보고는 여기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찾아갔는데 작은 식물원이 있었던 걸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겨울의 끝에 방문한 수목원은 초록의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마친 상태였고 곳곳에 꽃이 피어 있기도 했다. 벌써 꽃 접사 출사를 나오신 대포 부대도 있었고. 식물원 내부의 것들은 대체로 시들시들했는데 유리창을 통과해 들어오는 빛이 좋아서 빛바랜 초록이 있는 아늑한 공간의 이미지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렇게 유리 온실을 넘너른히 둘러볼 때만 해도 다음 코스가 세미 등산일 거란 건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 사람의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고.

앞으로의 일정이 많이 남은 상태에서 땀이 나는 게 싫었지만 등산하는 둘을 기다릴 곳도 마땅치 않아서 일단 따라 나섰다. M은 사내 산악회 회원이었고 T는 대학생 때부터 여러 운동을 섭렵해 온, 날이 좋을 때면 주 이동 수단이 따릉이인 체육인이었다. 체력 쪼랩인 나를 위해 중간에 쉬어가는 시간을 마련해줬음에도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옷을 더 챙겨왔으면 마음이라도 좀 편했을 텐데. 가방에 카메라가 두 개인 것도 한 몫 했고. 여러모로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엔젤리너스를 가고 싶지는 않아서 지도에서 주변 카페를 탐색했고 멀지 않은 곳에 인스타 갬성 낙낙한 곳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심지어 이름도 '그러므로part2'였다. 소규모 전시 타이틀 같다,고 생각하면서 수목원을 빠져나와 카페로 향했다. 가는 길에 꼭 망조의 망령처럼 생긴 모앙새의 구름을 보고 잔뜩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테이블에 앉아 마주한 M의 텐션이 낮아진 것 같아 혼자 있고 싶은 건지 물었는데 M은 그건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아니?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M은 숙소에서의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던 거였다. 하핫. 각자 할 일을 하다가 나는 따란- 하고 시집을 꺼내들었다. 둘은 마음에 들었던 시를 읽어달라고 하기에 '해는 중천인데 씻지도 않고'와 '대관람차' 중에 하나를 골라달라고 했고 최종 선택은 '대관람차'였다.

 

가방 속에 하나 이상의 거울을 넣어가지고 다녔다 /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줄곧 웅크렸던 귀가 툭 풀어질 것 같다 / 귓불에 살점이 붙던 시간은 왜 기억나지 않을까 // 바람이 태어난다고 믿게 된 장소 / 부드러운 거절을 위해 빼곡히 심어놓은 나무들 // 세상의 모든 미로는 인간의 귀를 참조했다 / 누구도 자신의 귀를 본 적이 없어서 / 뭐라고? 뭐라고? 미로 속에서 소리치는 사람들이 / 메아리와 함께 희미해지네 // 거울의 내부에는 가방의 내부가 있고 / 바람의 내부에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 매달린다는 것은 / 동심원의 가장 먼 주름으로 사는 것 // 막다른 벽이라 생각하세요 / 결국 빠져나갈 거라면 최대한 긴 과정을 / 출구 앞에 펼쳐놓을 것입니다 // 귓속에 이름이 쌓여 있을 것만 같다 /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잠자코 웅크렸던 수인들이 / 일제히 귀를 허물고 쏟아져나올 것 같다

- 유계영 <대관람차>

 

 

PHOTO BY. M

 

수풍석 뮤지엄은 이번 여행의 유일한 사전 계획이었다. M이 '이왕이면 멀리 떠나'라는 명쾌한 답을 준 직장동료의 추천으로 예약한 곳이었다. 택시를 타고 가다가 오른편에 커다란 민둥산이 보여서 기사님께 저긴 뭐냐고 물었다. 기사님은 연초에 산을 태우는 불놀이 행사를 하는 곳이라고 설명해주셨는데 조금 더 가다 보니 그 행사의 사진을 붙여 놓은 커다란 광고판이 보였다. 당연하게도 불타오르네, 로 시작하는 노래가 머릿속에서 재생됐고 동시에 인공 자연재해처럼 보이는 행사의 이유가 궁금해졌지만 굳이 찾아보는 수고를 하지는 않았다.

수풍석 뮤지엄 관람은 해설자의 인솔 하에 소수의 인원이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건축가 이타미 준이 각각 '물, 바람, 돌'을 주제로 지은 건축물을 둘러보는 코스였다. 날씨가 좋았다면 건축물을 좀 더 본래의 의도에 맞게 체험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좀 아쉬웠다. 건축물 자체가 명상의 분위기를 자아내 그 공간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이 신기했고, 다큐멘터리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를 보고 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람을 마치고는 이 길이 맞는 걸까, 의심하며 외진 길을 걸어 같은 건축가가 지은 방주교회에 방문했다. 사실 여기는 십여 년 전부터 와보고 싶었던 곳이라 도착했을 때는 '드디어!'의 마음이었다. 잠시 예배당 안에 앉아 있다가 조금 용기를 내서 둘에게 함께 기도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둘은 이번에도 흔쾌히 수락하며 각자의 기도제목을 이야기해줬다. M은 우리가 이 여행을 무사히 건강하게 마칠 수 있기를, T는 코비드19 사태가 빨리 마무리될 수 있기를 바랐다. 예배당 안에 있는 동안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빗줄기의 형태로 변했고, 예배당을 나와서는 교회 주변의 수면 위의 파동을 잠시 바라봤다.

왜인지 교회 옆에 있는 수제 양갱집에 가게 됐는데 잠시 빗줄기가 좀 잦아들길 기다리려는 이유였던 것 같기도 하고, 화장실을 쓰고 싶었던 요량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양갱을 보고는 너무 환호했던 탓인 것 같기도 하다. 와. 그런데 진짜 핵존맛탱. 창문 너머로 산방산이 어렴풋이 보였다. 저곳에 있는 멋진 숙소를 봤던 기억이 나서 다음에는 저기 갈까? 했는데 M이 저기는 오늘 오른 수목원의 오름보다 해발이 높다는 정보로 대답을 대신했다. 비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고 셋 다 체력이 소진된 상태라 별 고민 없이 택시를 불렀다. 그런데 택시 기사가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자꾸 사이코패스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해댔고 우리는 문제 없이 이 택시에서 내릴 수 있기를 바랐다. 다음엔 꼭 면허를 따서 와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PHOTO BY. T

 

이 여행에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나는 생각보다 느긋한 여행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는 거다. 쉬어도 밖에서 쉬어야 하는 타입이었다.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인데 숙소에 있을 수는 없었다. 숙소에서의 휴식이 필요한 M을 두고 T와 함께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인 이호테우 검은모래 해변으로 저녁 여정을 떠났다. 나에게 T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언제나 가장 큰 친구여서 혹시라도 내가 너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한다면 꼭 말해달라고 말했다. T는 하하, 웃으면서 이젠 그런 말 잘 한다며, 지금 당장 마스크를 쓰라고 했다. 오, 귣!

정신을 다른 데 두고 있다가 내릴 정거장을 하나 지나쳐 내렸는데, 덕분에 조금 길게 해변을 따라 걸을 수 있었다. 모래 위에 이어진 작고 귀여운 개의 발자국에 자꾸 웃음이 나기도 했다. T는 바다에 올 때마다 하늘이 크게 느껴진다고 했는데 한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라 이전과 다른 시각으로 바다를 마주하게 됐다. 바다는 빠르게 밤하늘의 색이 되었고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바다의 모습을 보며 별 말 없이 눈과 카메라에 풍경을 담았다. 공항과 가까운 곳이어서인지 계속해서 비행기가 큰 소리를 내며 낮게 비행했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괜찮은 걸까, 생각했다.

돌아가는 캄캄한 길 위에서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가 과연 언제까지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버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같기도 하다. 회사라는 세계를 떠나 사는 삶을 궁금해하고 조금은 바라기도 하면서 그에 대한 얘기들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숙소에 가기 위해 탄 버스의 기사님은 굉장한 라이더셨고 우리의 전전 정류장에서 내리려는 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한 소리 듣고 내리는 모습을 보며 올 때와는 다르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미리 내릴 채비를 해뒀다.

 

 

 

휴식을 취하고 기운이 올라온 M까지 합류해 광란의 과자파티가 시작됐는데, 과자와 맥주를 두 번이나 리필하러 편의점에 다녀올 만큼 흥이 많이 났다. 과자괴물이라 저날 과자 내가 다 먹은듯. 둘은 이렇게 많은 양의 과자를 한꺼번에 먹어보는 건 처음이라며 깔깔 웃었다. 독서모임을 하면서 하는 이야기들을 술을 마시면서도 했던 것 같다. 미래는 알 수가 없고, 그래서 우리는 늘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T가 마지막 맥주를 사러 간 사이에 주량을 넘긴 M은 내게 춤을 추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갑자기 왜 친절하면서 곁을 주지는 않느냐고 물었다. 어? 싶었지만 사실 아주 낯선 질문은 아니었어서 이번 기회에 잠시 생각을 해보려 했으나 생각을 더 하기에는 나도 텐션이 너무 높아진 상태였다. 룰루. 취한 M은 힘이 아주 세졌고, 자지 않겠다고 뛰어다니는 것을 잡아 침대에 눕혀놓았더니 곧 잠이 들었다. M을 재우고 나니 욕심을 부린 바람에 잔뜩 남은 맥주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웠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서 T와 욕실에 맥주를 흘려보냈다. 단짠으로 물든 마지막 날의 밤.

_

 

2020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