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Bossanova,

20221208-10_내년에는 서로 고비를 잘 넘기고 만나자, 우리 본문

TEMPERATURE

20221208-10_내년에는 서로 고비를 잘 넘기고 만나자, 우리

KNACKHEE 2022. 12. 10. 16:46

 

연차를 내고 비행기를 타면서 회사 일정을 낑겨 보너스 연차를 종종 받아낸다. 이번에는 부산에 배달해야 하는 그림이 있는데 걔가 혼자 무언가를 타고 가는 것보다는 내게 반차를 더해주고 비행기 편도 값을 대주는 게 더 이득이라서, 잡아뒀던 부산행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다시 끊었다. 또 법카 찬스로 공항에서 그림 배달 장소까지 택시를 탔는데 마침 퇴근 시간이라 택시 기사님과 긴 얘기를 나눴다. 5시 정도였는데 길이 막히길래 "이 시간에 왜 길이 막히죠?" "어, 아무래도 퇴근 시간이라 그런 것 같은데요." "헙, 정말요? 5시인데 다들 이 시간에 퇴근을 한다고요? 허업- 짱이다!"에서부터 서로 대화가 트여서 기사님이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택시 기사를 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택시도 부업이고 본업은 피아노 학원 원장님이시라고. 얘기를 듣다 보니 기사님이 나를 20대 후반 정도로 오해하신 것 같았는데 그냥 정정하지 않고 뒀다.
 
배달을 마치고 잡아둔 숙소로 와서 짐을 푼 후에 근처를 산책하다 보니 2017년인가 처음 이 센세와 함께 왔던 동네라는 걸 깨달았다. 용두산 공원 올라가는 초입이 익숙해서 생각나버렸지 뭐야. 오늘의 첫끼로 돈가스를 먹고 신이 나서 가다가 원래 8시 영업 종료인데 아는 손님이 찾아와 9시가 다 되도록 열어둔 동네 책방에 들러 시집도 한 권 샀다. 그렇지 않아도 내려와서 만날 동행도 있고 가방도 무거워서 책을 뺀 게 내내 아쉬웠는데. 럭키.
 
밥을 먹고 책도 사고 나니 노래방이 너무 가고 싶었는데 근방의 곳들이 무척이나 유흥업소라 그냥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다음 날은 A언니 집에 들고 갈 꽃을 사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언니네 집에 짐을 놓고는 바로 부산시립미술관으로! 이우환 공간은 원체 명상의 공간 같았는데 방문객이 우리뿐이라 더 좋았다. 언니와 나는 어떻게 바람,을 캔버스 안에 그려 넣을 생각을 했을지에 대해 내내 감탄했다. 그러고는 무슨 故 이건희 회장 기증전 헌터처럼 이곳에서도 그 전시를 봤다. 언니는 유독 박수근 작가 작품 앞을 금방 지나쳤는데 물어보니 너무 익숙한 작품이라 그런지 눈에 잘 안 들어온다고 했다. 김기창 작가님의 어떤 작품은 박래현 작가님 작품인 줄 알았을 만큼 화풍이 비슷했다. 장욱진 작가님 작품은 언제 봐도 너무 귀엽고, 김형구 작가님 작품은 <프렌치 디스패치>를 생각나게 하는 색감이었다. 그리고 회장님들은 병풍과 족자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전예진이라는 장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 일단 갤러리 문 밖에서부터 내적 비명 지르면서 입틀막하고 입장했다.
다른 사람이 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내가 되기를 선택하는 꿈을 꿨다. 꿈에서도 내 꿈은 나였다. 모든 방랑은 나의 외연을 넓히는 동시에 그 본질을 더욱 견고히 해주리란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깊이 애정하는 작가님과 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또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조금씩 더 선명해진다.
 

 
그래도 부산까지 왔으니까, 하면서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있던 광안리에서 짧은 산책을 했다.

 

 
부산에 오면 꼭 가보고 싶었던 오브제 후드에서 오지은 작가님과 강유정 작가님의 전시도 봤다. 공간이 멋졌지.
 

 

A언니와 함께한 둘째 날의 일정은 울산이었다. 개관했다고 했을 때부터 가보고 싶었던 울산시립미술관에 드디어 방문! 아트와 테크의 융합이라는 명백한 목적을 가진 곳. 처음 들어갈 때의 퍼포먼스가 좀 충격적이었는데, 당최 뭔지 모르겠어서 인스타 계정으로 문의하니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셨다.
 
안녕하세요! 궁금한 것이 있어서 연락드립니다. 어제 울산시립미술관에 방문했는데 인포에서 발권을 해주시는 직원분께서 발권 후에 AI처럼 "블라블라 테크놀로지"(정확히 못 들었어요 ㅠㅠ) 하고 외치시던데, 이건 미술관 브랜딩의 일종인지 아니면 현재 진행 중인 전시 연계 퍼포먼스의 일부인지 정말 너무너무 궁금합니다! 꼭 회신 부탁드려요! 고맙습니다, =)
― 안녕하세요, 질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내데스크에서 경험하신 '해프닝'은 티노 세갈 작가의 <이것은 기술이다 This is technology>라는 작품 입니다. 본 작품은 기억의 형태로만 존재하며 작가의 작업 의도로 사전 설명을 일체 제한하고 있습니다. 울산과 비슷한 도시에서 나고 자란 작가가 울산과 울산시립미술관을 고려한 작업이기는 하지만, 브랜딩이나 전시 연계 퍼포먼스는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진짜 너무 놀랐다.

 


태화강 십리대숲은 분명 4년 전엔가 혼자 취재 차 갔다가 들렀을 때는 무척 사색하기 좋은 곳이었는데 이번엔 둘이어서인지 그런 느낌은 잘 들지 않았다. 이곳에서 해가 지는 것까지 보고는 굳이 버스를 타고 1시간이 걸리는 곳에 가서 피자를 먹었지. 아무래도 이건 둘 다 서로를 배려하다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됐던 것 같다. 낄낄. 언니는 사실 이번 시험도 떨어져서 한 번만 더 해보고 안 되면 정말 다른 길을 찾을 거라고 했다. 이걸 여행의 마지막 날 밤에 말해주다니. 나는 그것도 모르고 마냥 해맑았네. 그런데 언니는 덕분에 좋았다고 해서 고마웠다. 우리는 둘 다 포기를 포기하고 다시 한 번 힘을 냈다가 내년 가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