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Bossanova,

우리가 있는 곳이 우리의 집이다 본문

TEMPERATURE

우리가 있는 곳이 우리의 집이다

KNACKHEE 2020. 3. 8. 01:21

어딜 가나 문제인 건 마찬가지라 이왕이면 멀리 떠난, 뜨거운 생활 in 제주_04

_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늦잠을 자고 숙소의 체크아웃 시간을 꽉 채운 뒤에 M이 찾아둔 브런치 카페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었다. 여행 내내 우리는 나 있는 곳이 내 집이다,라는 한 교수님이 했던 말을 자주 주고받았다. 농담의 농도가 짙은 말이었지만 왜 하필 그 말이었을까. 겨우 이틀을 머물 숙소를 집, 이라고 부르면서도 왜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우리가 함께이지 않았어도 우리의 숙소가 아늑하고 따뜻했을까. 친구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행에서는 시간에 맞춰 해내야 하는 게 없는 것이 가장 좋았다. 데드라인은 나를 일하게 만들고 종종 효율을 높여주기도 하지만 그동안 '데드라인'의 탈을 쓰고 주어졌던 시간들은 나를 갈아내야 지킬 수 있는 것들이어서 자주 숨을 쉬지 못하는 너댓 시간의 잠을 자다 깨곤 했다. 첫날 만났던 저자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마감이란 단어의 개념이 달라지고 출퇴근, 시발비용 등의 단어가 없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 자꾸 커졌다.

비행기 아래로 어제 봤던 검은모래 해변이 펼쳐졌다. 지금 저곳에 있는 사람들 중 몇몇은 우리가 탄 비행기를 창공에서 발견하고는 어제 저녁에 나와 T가 했던 것과 같은 걱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비행 시간은 애들의 새로 나온 앨범을 한 번 찬찬히 돌려 듣기에 좋은 길이였다. 새 앨범은 계속해서 이 지난함이 나의 잘못인지 자문하고 타인의 재단선과도 같은 시선을 견뎌내며 함께하는 행복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7년간 모든 앨범 속 이야기를 총망라하며 '나'라는 지도의 초기 라인업을 완성해가는 느낌이었다. 지난 연말 무대 중 하나의 콘셉트는 프러포즈였다. 이번 앨범은 전체가 팬들을 향한 프러포즈 같았다. 조금 황송하네. 너희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서 좋아하는 건데 이런 말들을 들어도 되는 걸까. 약한 모습, 완벽하지 않은 모습, 어두운 모습을 보여줘도 지금의 마음과 같을 수 있을까, 하는 내용의 가사들이 반복돼서 이달 초에 다녀온 콘서트에서 성규가 사랑받고 싶나 봐요,라며 민망하게 웃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노래들이 일단 지금은 사랑을 하겠다고 귀결되는 게, 못내 좋았다.

착륙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곧 비행기가 흔들렸다. 왜인지 완벽하게 좋은 직업은 있을 수 없을 텐데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자리를 지켜주는 모든 이들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뜬금없네. SNS 중독자라 갈아탄 지하철 안에서는 업로드할 여행 사진을 고르고 보정했다. 같은 풍경을 마주한 우리가 찍은 사진은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런 사진들을 가만 넘겨보다가 모두가 마주하는 똑같은 풍경을 다르게 만들려면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것도 확정짓지 않았지만 서로 다음,을 이야기하도 했으니 썩 성공적인 여행이었지 않나 싶었다. 다음엔 조금 더 멀리까지 함께 가볼 수 있지 않을까.

_

 

2020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