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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은 자정 전 취침

KNACKHEE 2017. 5. 12.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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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소원은 자정 전 취침이다. 지난주부터 착실히 새벽 퇴근을 했다. 하루는 2시가 넘어가자 온 몸에 쥐가 나는 느낌이 들었다. 한계,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장악했다. 3시 반에 퇴근해 4시에 들어와 씻고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누우니 5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8시에 눈을 떠 침대에서 내려왔는데 머리가 핑 돌고 속이 울렁이고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결국 그 여자에게 전화를 해 병원에 갔다 출근해야겠다고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일을 하는 데도 일은 줄지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효율의 문제다.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걸, 지 하고 싶은 걸 다 하겠다고 해서 문제다.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온다. 밑에 애들만 죽어나는 거지. 그걸 두고 자신은 굉장히 크리에이티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 기존의 콘셉들과 전혀 다른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냥 지가 하고 싶은 거다. 아무 맥락도 고려하지 않고. 촬영장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P씨를 불러댔다. P씨가 자신이 시킨 일로 자리에 없을 때는 수시로 나를 불렀다. 자신의 보조 배터리가 없다며 P씨를 시켜 한창 촬영 중인 영상팀 대리님께 차 키를 받아 차에 다녀오라고 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P씨는 하는 수 없이 카메라와 사투하고 있는 대리님께 죄송과 민망함이 가득한 얼굴로 차키를 받아 저어어어어어 멀리 있는 주차장에 다녀왔다. 보조 배터리가 충전돼 있지 않자 나한테 저어어어어 멀리 있는 숙소에 가서 자신의 보조 배터리를 충전시켜 놓으라고 했다. 생 신입으로 들어갔던 회사에서도 이런 심부름을 시도때도 없이 했던 기억은 없다. 심지어 이 여자는 약국과 편의점 심부름까지 우리에게 시킨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자기는 신입 때 선배 스타킹까지 빨았다며. 자신이 잘못된 경험을 했으면 그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 여자 앞에서는 모든 것이 소용 없음,이다. 촬영 당일 새벽까지 기껏 만들어 놓은 큐카드는 보지도 않고 어딘가 던져 뒀다가 어디에 뒀는지 말도 안 하고 /내 큐카드 챙겨줘/ 하고 보어 없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 여자는 맨날 주어도 목적어도 보어도 없이 동사만 있는 말을 내뱉는다. /다 했어?/ /그거 어디 있지?/ 이렇게. 뭘 다하고 뭐가 어디 있는 거냐고 묻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우리는 머리를 굴려야 한다. 네가 어디에 뒀는지 내가 어떻게 아니. 지 웃음도 못 챙기고 지 물건도 못 챙기고 지 시간도 못 챙기는 여자다. 엉망진창. 너도 그래서 나도. 우리 모두. 엉망진창이다. 이건 빙산의 일각이고, 누가 봐도 우린 그 여자의 시녀 같았다. 그러니 다른 팀도 우리를 우습게 보지. 팀장이란 여자가 자기 팀원을 그렇게 부리는데 다른 팀이 우리를 존중해줄 리 없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여자를 존중하는 팀원은 없다. 존중받고 대접받는 법을 모르는 여자다. 존중과 대접을 원하면 우리에게 먼저 인격적인 대우를 해 줘야 한다는 걸 전혀 모른다. 인격적인 대우,의 개념 자체가 없는 여자인 것 같다. 물론 마지막 뒤풀이는 우리가 낄 자리가 아니기도 했지만, 차라리 사실대로 직급 있는 사람들이 있는 자리니 먼저 숙소에 가 있으라고 했으면 괜찮았을 거다. 우리를 생각해주는 척, 자기 혼자 배우에게 주목받고 싶어서 우리에겐 먼저 들어가서 쉬라,고 여긴 내가 끝까지 있겠다,고 했다. 그렇게 속이 빤히 보이는데. 거짓말을 하기엔 연기도, 머리도 부족하다. 우리에게 일할 때 러블리해지면 안 된다고 했으면서 일할 때 가장 러블리한 건 본인이다. 현장에 있는 '멋진 커리우먼 나'에 빠져서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남의 말도 안 듣고 혀는 자연스레 짧아진다. 토크 시간에는 배우가 들지 말라고 했던 스케치북을 내게 들렸다. 자꾸만 가장 해 보고 싶은 캐릭터/장르 등의 식상한 질문을 쓰게 시켜서 숨고 싶었다. 질문 수준 하고는. 고루하고 지루하다. 다음날 아침엔 배우의 기상과 함께 두 시간여에 걸친 식사를 했다. 라면을 끓이고 그 국물에 샤브샤브를 빠뜨리고 칼국수를 넣고 팬을 바꿔 등심을 굽고 소시지를 굽고 스트링치즈를 구워주셨다. 그러니까 문제는. 또 이렇게 마무리를 별 탈 없이 해내고 나면 그래도 좀 마음이 누그러져 다음,을 생각해보게 된다는 거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사람들이 촬영 잘 끝났냐고 물어보면 우리는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지만 아무도 울지 않았고 다른 팀도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아무도 싸우지 않았으니 잘 끝난 것 같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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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멍청함 때문에 사갔던 엄청난 양의 소품을 돌아와 정리하는 데만 두 시간이 걸렸다. 그 여자는 자기는 피곤하니 먼저 사라져봐야겠다며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퇴근을 했다. 우리한텐 소품 정리를 시키고 그 후의 일까지 줬다. 우리도 피곤한데. 현장에서 뛰어다닌 건 우린데. 말이라도 똑똑하게 했으면 기분은 좀 나았을 거다. 나 피곤하니까 나는 먼저 갈게, 라니. 당연히 밑에 사원이 정리하는 게 맞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없던 정이 뚝뚝 떨어져 땅을 파고 들어갔다. 어쨌든 오늘만큼 퇴근 시간과 가까운 퇴근을 장담할 수 있는 날도 없어서 이 센세와 약속을 잡았다. 처음엔 7시에 신도림에서 보기로 했다가 불가능해져서 7시 반에 서울대입구역에서 보기로 했다가 그마저도 불가능해져서 센세가 우리 회사 근처까지 와 줬다. 결국 센세의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7시 40분. 이 센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정 떨어지는 이 센세네 반 애들과 그 여자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한껏 얼굴을 찌푸리고 한껏 눈을 구부려 웃었다. 정말이지. 녹록지가 않은 세상이다.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센세는 내 얼굴이 더 하얘졌다고, 하얗게 질려 있다,고 말했다. 나는 모든 것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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