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Bossanova,

어떻게 지냈어, 는 너무 광범위한 질문이라고 생각해 본문

DAILY LOG

어떻게 지냈어, 는 너무 광범위한 질문이라고 생각해

KNACKHEE 2023. 2. 25. 17:39

 

정신없이 축사하러 나가는 바람에 마스크 팔에 걸어 놓은 채로 했더라고. 휴. 지난 1년 동안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 해봤던 B의 결혼식 축사를 드디어 클리어.

_

 

B의 결혼식에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을 봐야 하는 게 예정되어 있었고 예정이 현실이 되어서 마주칠 때마다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거의 과 동창회 수준이라 대충 얼굴만 아는 애들이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왔는데 나는 진짜 이 질문이 너무 별로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질문을 광범위하게 하면 답을 뭐라고 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지냄,을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잘 지냈어, 같은 원하는 답을 주고 싶지 않아서 '와- 난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고 사회성 제로인 사람처럼 답했다. 그런데 사실 내가 질문한 그 애를 별로 안 좋아해.

_

 

결혼한 사람, 결혼해서 애도 있는 사람들의 얘기에는 낄 수도 없고 낄 의지도 없다. 너무 다른 세계라 노오잼.

 

 

결혼식이 끝난 후에는 센세와 근처 카페에서 얼그레이화이트를 클리어! 그러고 나서 역으로 가려고 보니 갤러리 스탠바이비가 동선 내에 있는 게 아닌가. 늘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집에서 2시간 이상 걸려 쉽사리 마음을 못 먹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마침내.
덕후도 가끔 계를 탄다고, 마침 갤러리에서는 세계관 덕후가 비명을 지를 만한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전시 설명문에 적힌 <에반게리온>과 같이 내가 접하지 않았던 문화 요소들을 보며 나의 좁은 콘텐츠 소비를 탓하기도 했다. 그걸 봤더라면 이 전시가 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면서. 그럼에도 마음을 동하게 했던 <Mercy>의 정보를 인포데스크(?)에서 조금 더 살펴보고는 나가려는데 안쪽에 계시던 분께서 또 마침, 저기 계신 분이 작가님이니 작품 설명을 듣고 가라고 해주셨다. 덕분에 작가님과 서로 "아, 제가 낯을 좀 가려서", "어, 저희도요! 저희도 낯가려요!" 하고 낯을 가리며 차근히 작품 설명을 들었다. 와, 진짜 핵꿀잼. 작가님의 첫 개인전에서 작가님의 도슨트까지 들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러브 코인'이 존재하는 세계. '좋아요'가 러브코인으로 환전되기에 인기와 인지도는 곧 돈이었다. 지금의 세계에서도 막연히 그렇겠지,라고 생각되는 것이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구체화된 셈이다. 이 세계관의 두 주인공은 세상에 버림받은 듯한 경험을 한 스트리트 아티스트 Rimber와 멋지고 강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상처를 지닌 Tachi. 그들이 유명 인플루언서의 러브 코인을 훔치려는 여정이 담긴 애니메이션이 한쪽에서 모니터로 송출되고, 화이트큐브에 늘어선 캔버스에는 Rimber가 그린 그림들(2)이 담겨 있었다. 러브 코인을 삼킨 인플루언서가 괴물로 변하며 관심의 이중성을 표현한 것도 흥미로웠지. 애착 인형을 너무 가까이 두고 관심을 주다 보니 망가져버린 걸 표현한 전시 작품과 같은 맥락으로 읽히기도 했고.
Rimber가 그린 것 중에는 고군분투 끝에 왕좌를 차지했지만 종내엔 허탈함을 느끼고 마는 작품이 있었는데(4 / 제목을 안 찍어왔다, 흑흑) 왕좌의 네 다리에 소음 방지용 테니스 공이 있어서 깨알같이 즐거웠다. 작가님은 그게 포인트 중 하나인데 이걸 모르는 세대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난감해하셨다. 하지만 작가님과 꽤나 동년배라 설명 없이 알아차려버린 나와 센세. 낄낄. 즐거운 동시에 이런 디테일한 스토리와 떡밥들을 어떻게 사전 정보 없이 전시를 찾은 이들에게 전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다시 한 번 고민해보게 되기도 했다. 멋진 것들을 효과적으로 잘, 보여주는 역할을 또 잘, 해내는 사람이고 싶다.
<Mercy>는 설명 없이 들었을 때에도 좋았는데 듣고 나니 더 좋아졌다. SWOT으로 치면 S가 W를 포용하며 모든 모습의 나를 인정하는, 그런 너낌. 무엇보다 좋았던 건 작가님 전시 인터뷰 영상의 마지막 멘트였다. "이제 전설이 될 송정민 작가의 작품을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진짜 속으로 박수 천이백 번 침. 이런 거 진짜 너무 좋다. 아트 토이 나오는 날 기다리면서 총알 장전해야지.

 

 

결혼식인데, 첼시 안에 핫핑크 양말 정도는 신어줘야지.

 

'DAILY LOG'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엇을 그만두고 시간을 벌어올까  (0) 2023.02.27
오늘 결혼식은 좀 즐거웠다  (0) 2023.02.26
능력이 욕심을 못 따라가서 너무 괴롭다  (0) 2023.02.23
암 레디  (0) 2023.02.19
HAPPY J-HOPE DAY  (0) 2023.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