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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LOG

너무 좋다 연희동

KNACKHEE 2023. 5. 20. 19:07

 

도나 후앙카(Donna Huanca)라는 이름을 처음 만난 건 2018년 10월의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벨베데레 궁전 하궁에서 개인전이 진행 중이었고 온몸에 페인트를 두른 모델들의 라이브 퍼포먼스가 강렬한 인상을 남겨 여행 이후에도 종종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곤 했다. 그러다 그 이름을 생각지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났다. 2021년 키아프 참여 갤러리를 살피다가 본 페레스 프로젝트(Peres Projects) 부스. 그 다음해 서울 지점을 오픈한 페레스 프로젝트의 개관 그룹전 <SPRING>에서도 도나 후앙카의 이름을 다시 한번 마주했다. 그제야 지난 여행에서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관람한 전시가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이런저런 핑계로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나지 못하다가 이번에는 심지어 궁금했던 공간에서 개인전을 한다기에 결심하고 날을 잡았다.

도나 후앙카는 2017년 아트 바젤 언리미티드 섹션에 소개되며 글로벌한 인지도를 얻었다. 그는 라이브 퍼포먼스가 주축이 되는 작업을 선보인다. 특히 그는 여성 모델과의 협업을 통해 미술사에서 연약한 존재로 여겨지는 여성과 욕망의 대상으로 다뤄지곤 하는 여성의 신체에 강력한 주체성을 부여한다. 작업의 핵심은 삶의 순환과 시간의 흐름이다. 신작 회화 <BLISS POOL>(2023)(7-9)은 과거 퍼포먼스 사진 위에 모래 등을 섞은 오일 페인트를 손으로 채색한 작품이다. 여기에는 타고난 신체를 통해 이미지를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또 작가는 옷, 머리카락 등을 인간의 DNA와 기억 등이 새겨지는 매개로 여겨 이를 작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동명의 조각 <BLISS POOL>은 팬데믹으로 라이브 퍼포먼스가 불가능해지자 전시 관람객들에게 퍼포머의 역할을 부여한 작품이었다. 작품을 들여다볼수록 더 선명하게 보이는 건 그걸 보는 내 표정이었다. 사실 그때 내 감정은 조금 복잡했다. 처음 봤을 때와 변함이 없는 작업의 일관성에 대한 경이와 장애물을 만났을 때 이를 타개한 방식에 대한 감탄과 여러 매체를 통해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던 공간 내외부에 대한 당혹스러움.
전시 공간 전에서는 타이어가 타는 듯한 냄새가 났는데 이는 남아메리카에서 전통적으로 정화와 의식에 사용된 신성한 나무 팔로 산토에 머리카락이 타는 듯한 향을 더한 것이라고 했다. 거기에 반복 재생되는 소리는 피어싱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내게는 서낭당의 구슬을 떠올리게 했던 요소들과 합쳐져 제의 한복판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키키 스미스가 자신의 작업은 신체와 기억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가 '신체와 기억의 관계'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면, 도나 후앙카는 '기억이 담긴 신체' 그 자체를 도구이자 재료로 사용하는 셈이었다. <향수>의 그르누이처럼. 부지런하지 못해 전시 초반의 라이브 퍼포먼스를 놓친 게 내내 아쉬웠다.

 

 

연희동은 언제나 좋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생각했다. 나를 잘 꾸미는 사람이기보다는 나를 잘 정돈하는 사람이고 싶다고.

 

 

전시 서문의 첫 문장으로 이미 이 전시에 대한 호감도는 최고치를 찍었다. '회화는 빈틈에 형상을 채워넣는 여정이다.' 내적 박수갈채로 이 전시 감상의 여정을 시작했다. 전시장에 빼곡히 붙어 있는 작가 소개글들도 밀도 높은 명문이라 내내 감탄했지.

전시에서는 자신들이 다루는 '리얼리즘'을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로 작가에 의해 성립하는 세계 인식·표현의 방식'으로 범주화한다. 또한 '히스테리아'는 그간 한국 주류 리얼리즘에서 소외되어 온 '재현'의 측면을 다루는 동시대 작가 13인이 세계에 반응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들은 광장의 가장자리에서 첨예한 시선으로 오늘날 온·오프라인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특징을 진실되게 탐구한다.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도안 삼아 수채 물감, 과슈 등을 겹겹이 쌓아 올리는 점묘화 형식의 노동 집약적인 작업으로 자신과 회화를 둘러싼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표현한 김혜원 작가님의 작품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노충현 작가님의 <여름의 끝>과 손현선 작가님의 <도는 사이>는 각각 대사보다 시선으로의 감정 표현이 더 많은 인디 영화의 엔딩과 오프닝 장면 같았고. 정수진 작가님의 <학교>에서는 작가 설명문에 언급되기도 한 정세랑 작가님의 <보건교사 안은영>의 장면들이 겹쳐 보였다. 조효리 작가님의 <부츠>는 꼭 그래픽처럼 보이기도 했고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넘버 2>의 평행 세계라는 점도 흥미로웠지.

솔직히 이 전시에서 담론화하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으니, 일단은 더 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이름들을 불러봐야지. 김혜원, 노충현, 손현선, 정수진, 조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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