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Bossanova,
룸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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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분에 걸친 면접을 봤다. 어제 과제를 보내면서 망했구나 싶어서 연락을 기다리지 않았는데 연락이 와 놀랐다. 그런데 면접을 보고 나오면서 이것이 이 회사와의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면접이면서 요즘 젊은 기업들이 차용하는 인터-뷰의 형식이었는데, 질문에 대답하면 할수록 나는 별로 회사에서 원하는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인터뷰 도중 내가 묻는 것들에 호쾌하게 대답해 줘서 놀랐다. 말미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호의 잡지를 주셨다. 안 그래도 사서 보려던 참이었는데. 그 정도의 소득으로도 괜찮을 것 같다. 아마 긍정의 연락을 받지 못하겠지만, 과정들이 고마웠기 때문에 계속해서 나는 이곳의 책들에 관심을 두게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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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야 할 일이 있는 리아언니가 마침 종로 쪽에서 선배의 약국 일을 도와주고 있다기에 서로의 업무가 끝나고 만났다. 이름을 정하고 타깃을 정하고 설명할 문구를 정하고 대략의 콘텐츠를 정했다. 역시 만나면 일이 빨리 진행된다.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온라인으로 무언가 일을 진행하는 건 더디고 어려운 작업이란 생각이다. 이래저래, 시작까지 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일단 시작했고 발동이 걸렸으니 차분히 해 나가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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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한 번 나오는 건 무척이나 일이니까 나온 김에! 하고 뒤이어 보람이와의 일정을 잡았다. 보람이는 나를 을지로에 있는 개화기 시대의 느낌이 물씬 나는 카페에 데려가 주었다. 맙소사. 자개장과 서양식 테이블, 의자의 조합이라니. 1층엔 한약재를 담아 놓던 장도 디스플레이 돼 있고, 입구엔 오대오 머리를 하신 장신의 아저씨가 조신히 앉아 커피콩을 고르고 계셨다. 심지어 필터 커피를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커피를 내려줬다. 보람이가 조금 연하게 타달라고 말하고는 자신이 커피를 '타' 달라고 했다며 너무 촌스러운 단어를 쓴 것 같다고 부끄러워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단어가 이곳과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개화기 때는 커피를 내려주기보단 커피를 타줬을 것 같다. 혹은 그냥 '줬'겠지. 좋아하지만 잘 없는 메뉴인 카라멜 라떼도 있어서 깜짝 놀랐다. 주문한 것들을 받아 2층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계속해서 두리번거렸다. 룸펜이 된 느낌이었다. 사실 룸펜이 맞기도 하고.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는 드라마 경성스캔들이 떠올랐고, 이상 아저씨와 백석 아저씨가 오면 좋아할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멋진 곳에서 우리는 아직도 여성에 대한 구시대적인 시각들을 갖고 있는 사회에 대해 얘기했다. 여러 반박들이 오가겠지만, 여자가 살기 무서운 세상인 건 사실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조심하라니. 사실 조심할 상황 자체를 만드는 이들이 문제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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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는 길에 오랜만에 선배한테 전화를 했다. 오랜만에 전화하니 반갑죠? 하고 묻고 어, 반갑네~ 하는 답을 받았다. 엎드려 절받았다고 웃으니 그렇게라도 받으면 된 거 아니냐고 했다. 선배네 교회엔 자신을 제외하고도 국문과가 여덟 명이라고 하길래 놀라서 진심으로, 그럼 그분들은 다 무슨 일을 하세요? 하고 물었다. 선배는 잠시 생각하더니 어, 그러고보니 다들 대학원생이네, 했다. 대학원이 답인가. 요즘은 정말 대학원으로 도망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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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문득, 꽃길은 사실 함께 걷는 진흙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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