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Bossanova,

내내 눈물 바다였던 오늘 본문

DAILY LOG

내내 눈물 바다였던 오늘

KNACKHEE 2022. 5. 8. 15:59

세 번째 상담을 마치고 기억 나는 대화의 조각들.
나는 늘 내 얘기는 할 게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일이 잦다. 내 얘기는 할 게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아무도 날 궁금해하지 않을 거란 뜻이기도 한 것 같다. 이것과 얼마 전 대표와의 대화 후 무능한 사람이 된 것 같아 회의실에 들어가서 20분을 울었다는 얘길 했다. 내가 준비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질문을 받고 답을 하지 못하면 무능을 입증하는 것 같아서 공격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더니 그것과 연관해서 mmpi에 대한 결과를 먼저 보자고 하셨다.
mmpi에 대한 해석은 이랬다. 많은 문제들에 당면해 있어서 누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이 큰 듯한데 완전히 믿고 얘기를 편하게 털어 놓을 사람이 없어서 더 힘든 상황인 것 같다고. 그 얘길 듣는데 코끝이 찡했다. 그러게. 누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들을 해온 게 아닐까 싶어 결정권을 남에게 주고 싶어 하거나 미루는 듯한 모습이기도 한 듯하다고. 상황이 그렇다 보니 결정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 같다는 얘기도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떤 무리에서든 특별히 관심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는 애,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관심을 받으려면 뭐라도 더 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관심은 타인이 나를 궁금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이고, 궁금해한다는 건 안부를 묻는 일이기에 연결되어 있고 어떤 유대가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라 이를 원했던 듯하다. 인스타에 뉴스레터 사연을 빌어 은근슬쩍 내가 상담 받는다는 얘길 했는데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고 일을 더 잘 해보고 싶어서 이것저것 배우고, 대체로 지인들을 먼저 챙기는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그런데 그게 그냥 되는 게 아니고 단순히 그런 것들을 내가 좋아해서도 아니고, 내가 노력하고 애쓰고 있는 영역의 일이라는 걸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런 기대는 대체로 충족된 적이 없다.
나는 다정하지만 곁을 잘 내주지 않는단 얘길 종종 듣는다. 선생님은 무엇이 그걸 막고 있는지, 먼저 다가가 관계를 맺다가도 어느 지점에서 나를 너무 침범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물러서게 되는지 앞으로 알아가보자고 했다. 한 편집장은 뫄뫄 씨는 꼭 한 발 물러서서 남 일처럼 얘기하는 경향이 있어요,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대체로 하고 싶은 게 명확하지만 그게 옳은 선택이란 확신이 없기에 주장할 수 없고 남의 의견을 더 듣고 맞추는 편이라 타인에게는 책임을 회피한다거나 우유부단하단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내가 한 선택으로 만들어진 나라면. 지금의 내가 만족스럽지 못한 건 과거의 내 잘못된 선택들의 결과일 테니까. 지금은 사소한 것들조차 무언가를 결정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했더니 선생님은 조곤조곤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과거를 다 짊어지고 있네. 무겁겠다." 그 말에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런데 과거를 곱씹지 않고 생각하는 법을 모르겠어요" 하고 어리석은 소리를 했다. 선생님은 내가 하고 싶은 일도, 꺼내 보이고 싶은 것들도 많은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해서 답답한 상황인 것 같다고 했다.
사회생활 4년 차쯤부턴 저금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을 텐데 하지 못해서 지금도 회사를 바로 그만두지 못한다고. 다른 친구들이 돈이 없다는 건 적금을 다 넣고 쓸 게 부족하다는 뜻인데 나는 진짜 돈이 없는 거라고. 자기 절제가 전혀 안 되는 사람이란 방증인 것 같아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그 돈을 쓴 게 후회되진 않지만 미래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지 않았고, 같은 불만만 쏟아내고 있는 게 부끄럽다고. 늘 충분한 고민 없이 닥쳐서 가능한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식이었는데 지금은 2-3달 정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내뱉었다. 논문을 최우선에 두는 선택을 하고 싶지만 그러다 결국 논문도 경력도 다 엉망이 돼버리면 어쩌나 싶어 쉽사리 결정을 못 하겠다. 엉망인 상태가 너무 오래돼서 이제는 희망차고 의지적인 나로 텐션을 바꾸는 자체가 너무 어색해 뭘 하지를 못하겠다.
상담을 받으러 갈 거라고 엄마한테 말했다가 내가 느끼기에는 다분히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반응을 얻었던 일도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신앙으로 힘든 일을 이겨낸 경험도 있고 언제나 어떤 문제들을 마주했을 때 감정에 빠지기보다는 해결책을 찾는 사람이기에 내가 이해되지 않았을 것 같다. 또 엄마 입장에서는 내가 반복된 불만을 해결은 못하고 징징대기만 하는 걸로 느껴졌을 것 같고. 상담 말미에 선생님은 이 얘길 하시며 고2-3 때면 관심과 케어가 필요한 시기인데 자신을 위해서라고는 해도 당시 아빠가 가계를 무너뜨린 일로 힘들었던 엄마가 더 신경쓸 일 없도록 본인이 했던 노력도 엄마가 그 시기를 지나는 데 도움이 됐을 거라는 말을 해주기도 했다.

눈물을 한바가지 쏟아서인지 끝나고 카페에서 이론 정리하다가 쫌 졸았다.
_

오늘 들은 설교가 진짜 참신한 시각이라서 기록.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접근한 설교는 처음이었다.

누가복음 21장 1절-4절 "헌금과 생활비"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의 기록이다. 예루살렘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성전이다. 예루살렘에 간다는 건 성전에 간다는 것과 동의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의 성전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의 놀이터가 된 지 오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인 곳이었다. 본래적인 의미가 망가지고 타락했다는 것을 당대의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들도 알고 있었을 거고. 그런데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권위를 좀 부리는 게 그렇게 잘못된 것일까? 여기서 문제는 종교적 권위를 갖는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 누군가의 삶을 옥죄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죄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드리라고 과부의 사례를 드신 게 아니다. 권력자들이 무엇을 옥죄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셨던 거다. 그럼 과부는 성전 체계를 비판하고 고발하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장치일 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셨다. 당시 사회에서 과부는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존재였다. 그런 과부가 몇 천 원 정도 되는 전 재산, 두 렙돈을 헌금했다. 예수님은 그걸 보고 그것이 이 여인의 전부이고 무리 중 가장 많이 했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고 있는가? 성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하고 계셨다. 성전 체계 비판, 가난한 여인의 헌금. 이를 듣고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든 빨리 달려가서 성전을 나서려는 그 여인을 돌려세워 오늘 먹을 것 좀 있는지, 혹시 아픈 데는 없는지, 할 일은 있는지 등을 물어야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자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늘 누군가의 삶을 평가하고 있는 건 아닌지, 힘든 이를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야 한다. 힘에 겨운 이들이 오늘을 살아갈 힘이 있는지 물어야 묻는 게 그리스도인의 책무이고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이런 일일 것이다.

'DAILY LOG'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암 쏘 슬리피  (0) 2022.05.10
귀가 황송하네  (0) 2022.05.09
이게 얼마 만의 행복이야  (0) 2022.05.07
내가 보낸 사연인 줄 알았네  (0) 2022.05.06
내가 너를 서울, 한다는 것은  (0) 2022.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