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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LOG

4등

KNACKHEE 2016. 5. 27.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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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면부지의 타인 셋이 단란하게 4등을 관람했다. 원체 상영관이 많지도 않고 개봉 후 시간이 좀 지나기도 해서 상영관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운 좋게 종영을 며칠 앞두고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볼 수 있었다. 영화의 호흡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글들을 봤다. 러닝타임을 확인하지 않고 들어갔고 체감 상영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였는데 나와서 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 흘러 있었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아이를 몰아세우던 준호 엄마의 연기 때문인가 싶다가 허허, 고놈 참,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귀엽고 담담한 눈망울로 잔망스럽게 연기도 수영도 잘 한 준호 때문인가 싶다가 초반에 넋을 놓고 봤던 정가람 씨의 몸 선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인권위원회와 관련해 제작된 영화라는 걸 염두에 두고 보면, 영화에서 세 가 정도의 인권을 도출할 수 있다. 대회에서의 실적을 목표로 묵인되며 자행되고 있는 폭력 앞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체육인의 인권, (아마도) 사회적인 이유로 결혼과 출산 후 자식을 중심에 놓지 않고는 삶의 가치와 목표를 수립할 수 없는 여성의 인권, 기성세대의 기준과 자본주의 사회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면 삶 자체가 부정당하고 실패자로 낙인찍히는 현실에 학대받는 아이의 인권.

 

아이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때려서라도 그 아이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걷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길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틀을 벗긴 후에도 유효한 것일까. 체벌의 개입으로 형성된 목표가 체벌을 피하기 위한 목표가 아니라 정말 승부욕이라는 것이 생겨 수립된 목표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목표라는 건 스스로 책정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 너와 내가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아니, 내가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네가 수영을 그만두겠다는 결정을 내리냐고 자지러지는 엄마는 혐오스러운 것일까 불쌍한 것일까. 아이가 맞아서 온 몸에 멍이 들고 체벌의 두려움에 떨더라도 거의 1등에 가까운 2등을 하면 그 엄마와 아이는 행복할까. 방식이 어찌됐든 계속 일등을 하며 자란 아이는 결국 엄마에게 고마워하게 될까. 엄마가 아이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사회 환경 조성은 과연 이 나라에서 가능한 것일까. 자신이 찾아낸 걸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에게 주어진 걸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둘 중 어느 방식에 대해 옳고 그름을, 나쁘고 좋음을 논할 수 있을까. 후자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게으르고 발전이 없는 사람들인 걸까. 좋은 성적을 얻지는 못해도 좋아하고 조금은 잘 하기도 하는 일을 계속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건 잘못된 것일까. 좋아하는 일이지만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일은 힘을 다해 하게 돼 있고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인정도 따라오게 돼 있다는 자기계발서들의 말은 어느 정도나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여러 물음들이 떠올랐지만, 시간이 지나도 머릿속을 맴도는 아이의 말 앞에선 모든 질문들이 힘을 잃고 만다. 여러 물음을 물으며 양쪽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는 척 했지만 결국 마음은 이미 아이에게 기울어 있기 때문일 테다.

 

"엄마, 나는 수영에 소질이 있어. 수영을 좋아해. 그런데 1등이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이렇게 또 나는 내게 면죄부를 주고 합리화를 자행했다. 마음속엔 1등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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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와 가은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 꽃을 샀다. 꽃을 선물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말하자면 타인을 위한 선물이지만 실은 나를 위한 선물이었던 거다. 작년 봄에 우연히 들렀던 띄므망끄를 애써 찾아가 미니 장미를 샀다. 한 대에 여러 송이의 꽃이 피게 만들어낸 종이라고 했다. 색이 그려낸 무늬가 독특해서 샀는데 나중에 가은이가 사용한 마블링이란 단어 뒤에 대패 삼겹살을 내뱉곤 한참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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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활한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수제버거집에서 가격도 맛도 좋은 버거를 먹었다. 그리고는 길을 걷다 저기 갈까? 해서 별 기대 없이 들어간 작은 카페에서 이렇게나 아기자기한 공간과 마주했고, 다락을 차지하는 행운도 얻었다. 가은이는 졸업 후 들어간 회사에서 벌써 2년을 넘겼다. 3년 근속을 하면 일주일의 휴가가 주어지는데, 일단 그것까지 챙긴 후에 이직을 고려해 볼 거라고 했다. 가은이의 진득함이 부러웠다. 나는 왜 이렇까. 그렇지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모든 일은 쌍방과실이고, 환경의 변화를 썩 즐기는 편이 아닌 나는 늘 오래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수심이 깊어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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