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Bossanova,

어제와 오늘의 퇴근 후 전시 본문

DAILY LOG

어제와 오늘의 퇴근 후 전시

KNACKHEE 2023. 8. 31. 17:12

 

 

 

그림 앞에 서자마자 어떤 설명이나 제목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울음을 참아야 했던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알폰스 무하 뮤지엄에서 봤던 <Star>(Woman in the Wilderness or Siberia)였고, 두 번째는 알베르티나에서 본 클로드 모네의 <The red kerchief portrait of madame monet>, 그리고 세 번째가 이번에 국중박에서 본 빈센트 반 고흐의 <Long Grass with Butterflies>. 신기하고 정직하기도 하지. 창작물에는 그 너머에 존재했던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다.

이번 전시에서는 박물관 특유의 기획 스타일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이렇게 학구적일 수가. 작품마다 꼼꼼하게 주석을 달아 두고, 중간중간 이 작품들이 어떻게 복원되었는지, 금박 액자를 어떻게 만드는지 등 작품의 비하인드 영상 자료를 곁들여 구성한 덕분에 '오-', '아-'를 남발하게 됐다.
공간 연출도 정말 극적이었지. 들어가는 입구부터 당대의 건축물을 닮은 가벽을 세워두고 비장한 음악을 깔아줘서 입장과 동시에 전시의 시대상에 과몰입하게 됐다. 전시 중간에 있던 3분 남짓한 영상은 세 번을 연달아 봤다. 빈 벽 한가운데에 내용물이 없는 피지컬 액자를 두고, 그 위에 빔을 쏴 액자를 중심으로 내셔널 갤러리의 의의를 전달하는데 그 임팩트 있는 기획을 어떻게 한 번만 봐. 진짜 기획자님 너무 천재시다.

그런데 퇴근 후였는데도 정말 정말 정말 사람이 많았고, 다들 오디오 가이드를 듣고 계셔서 전시를 보는 내내 이어폰 밖으로 넘치는 소음에 자주 괴로웠다. 좋은 걸 보는 데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는 건가.
아. 작년에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했던 <영국 테이트미술관 특별전 : 빛>에서 마주한 이름들을 다시 만나 반가워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고, 작품 속에 미인들이 많았던 것도 좋았다. 미인이 최고지.

 

 

퇴근길에 전시도 보고 막둥이 생일 케이크도 먹자니 진짜 너무 피곤했다. 누나들이 너네 생일 이렇게나 열심히 챙겨 먹어,... (?

 

 

시간이 제일 귀하다. 고백하자면, 시간을 쓰는 데에 인색한 편이고 가능하다면 돈을 들여 시간을 사는 선택을 한다. 그런데 엄유정 작가님의 전시를 보면서는 생각했다. 이 유연하고 단단한 아름다움을 내가 감히 시간 정도를 지불하고 눈에 담아도 되는 걸까, 하고.

그림 속에 겹겹이 쌓아 올린 다채로운 색들은 작품에 담긴 빛의 시간과 색을 고르고 칠해나가는 작가님의 시간을 생각하게 했다. 작품들은 눈과 바위와 수풀의 '형태'를 그려낸 것이었다. 그래서 전시의 타이틀도 <Three Shapes>.
그렇지만 그림 속 요소들이 특정한 장소의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형상을 갖고 있지만 어디의 무엇도 아닌 작가님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그만이 꺼내서 보여줄 수 있는 눈과 바위와 수풀. 작가님의 세계 속 창밖에, 다음엔 무엇이 놓일지 궁금해졌다.

작품에 가득 쌓인 눈 덕분이었을까. 여름의 마지막 날, 이 계절에 안녕을 고하는 쾌청한 공기를 잔뜩 들이마신 느낌이었다.

 

 

비장해지지 말아야지.

_

 

한때 엄청 좋아해서 그 브랜드에서만 양말을 사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곳의 것을 거의 사지 않게 되었다. 너무 예뻐졌거든. 나는 그곳의 양말 그 자체보다도 그곳의 위트를 좋아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