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Bossanova,
바다의 뚜껑 본문
K의 잘생긴 프롬 네덜란드 과외 선생님이 지리산 트랙킹을 간 덕분에 예배를 마치고 간만에 데이트를 했다. K가 보고 싶다던 <바다의 뚜껑>은 상영관이 많지 않았는데 다행이도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서 볼 수 있었다.
영화는 무료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손님도 거의 없는 여주인공의 빙수 가게는 여유롭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이런 저런 마케팅을 동원해 모객을 할 의지도 보이지 않아 타인이 보기엔 여주인공의 빙수 가게가 취미 생활인가 싶기도 하다. 극의 후반부에 여주인공의 남자사람친구가 자신의 야반도주를 말리는 여주인공에게 폭발하며 대충 이런 맥락의 말을 던진다. /네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이곳을 떠나 도쿄에서 아무 생각 없이 지낼 때, 나는 이곳에서 이렇다 할 빛도 보이지 않는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이제서야 돌아와 취미로 빙수 가게를 하는 네가 뭘 알겠어./ 틀렸다. 여주인공에게 빙수 가게는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었을 테다. 자신이 확신했던 길에서 확신을 잃고 더불어 모든 삶의 방향을 잃고 그 가운데 애써 잡은 게 고향에서의 빙수 가게다. 빙수만큼은 싫어했던 적이 없단 이유로.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금의환향과 정반대의 이유로 다시 고향을 찾기까지 여주인공은 남자사람친구만큼이나 치열한 고민 속에 살았을 것이다. 흔들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건 여주인공 부모님 친구의 딸이다. 할머니 손에 키워진 여자 아이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갈곳을 잃고 여주인공의 집에서 잠시 함께 살게 된다. 아이는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여유도 없이 재산 분할 같은 문제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친척들을 마주했을 테다. 아이는 일찍 상처를 받았고 일찍 어른이 됐다. 남자사람친구의 작별인사를 알아챈 것도, 이를 두고 속상해하는 여주인공을 힘껏 안아준 것도 아이다. 그리고 아이는 모든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인형을 만들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난다. 아이가 아프리카로 가기 전에 한 일은 마지막으로 바다에 들어가 /바다의 뚜껑/을 덮는, 즉 바닷물을 이불 삼아 누워있는 것이었다. 바다는 종종 모든 것을 품는 비유로 사용된다. 여기서도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바다의 위로는 용기가 돼 각자의 삶을 지속하게 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시카고 피자를 촵촵 너무 야무지게 먹은 덕분인디 영화의 초반부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깼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혹시 내가 잠든 사이에 영화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았느냐 물었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다. 일본 영화의 미. 영화관을 나오자 비가 그야말로 쏟아지고 있었고 K는 내일 있을 친구의 결혼식에 전투적인 자세로 갈 예정이었으므로 전투복을 사야 했다. 빗속을 헤치며 세 시간여에 걸친 쇼핑을 했지만, 싼 것 중엔 마음에 드는 게 없고 마음에 드는 옷은 터무니없이 비싼 경험을 반복해서 하곤 포기 상태가 돼서 스벅에 안착했다. 우리가 사치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옷을 한 벌 사겠다는 건데,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어서 속이 상했다. 허기가 져서 저녁까지 먹고 헤어지자! 하고는 일전에 만족하며 먹었던 쌀국수집을 애써 찾았다. 쌀국수 가게 맞은편 옷집이 K의 눈에 들어왔고, 그곳에서 오늘 K가 입어본 것 중 가장 괜찮은 옷을 가장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다.
취직을 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 K는 확실히 취준생일 때 없던 생기가 돌았다. 자기 말로는 해야 할 게 너무 많고, 옆에 있는 똑똑한 개발자들이랑 비교가 돼서 힘들어 죽겠다고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성취감과 활동이 주는 생기가 있었다.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