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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ERATURE

좋은 것들로 채우고 있다, 마음을

KNACKHEE 2018. 11. 8. 00:30

아홉수를 앞두고 백수가 돼 떠나는 동유럽 여행_10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일정은 자허-토르테(Sacher-Torte)의 원조라는 카페 자허에서 BTS 지민의 생일(한국 시각 기준) 축하 케이크 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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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관광지 할인과 교통 무료 이용 혜택이 있는 '비엔나 시티 카드'를 사러 빈 중앙역에 갔는데 운영 시간을 확인하지 않고 간 탓에 인포 데스크 오픈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검색해 보니 역 근처 호텔에서도 판매한다고. 역 근처 호텔이라면 우리가 묵는 곳이잖아! 우린 시간이 많고 숙소는 지척이고 밑져야 본전이니 다시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숙소 리셉션에서 비엔나 시티 카드를 살 수 있는지 묻자 금발의 직원 올리버(Oliver)는 눈을 맞춰 찬찬히 들어주고는 "Sure!" 했다. 2일권을 구매하고 맞는지도 모르겠는 문장을 미간을 좁혀가며 느릿느릿 구사해 체크아웃 후에 짐을 맡길 수 있는지 물으니 그는 또 웃으며 "Of coures!" 하고 답했다. 빈 친절상은 올리버 님께 드리는 거로. 땅땅. 아니 어쩜 이름도 올리버야.







벨베데레 궁전과 쇤브룬 궁전 중 어딜 먼저 갈지 고민하다 비엔나 중앙역에서 더 가까운 벨베데레를 내일로 미뤘다. 잘츠부르크의 헬브룬 궁전처럼 쇤브룬 궁전도 여름 궁전이었다. 주인은 달랐지만. 사투리와 이민 2세의 느낌이 섞인 묘한 발음의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관람을 도왔다. 여섯 살의 모차르트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위해 연주를 했다던 연주곡이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흘러나왔다. 덕분에 잔뜩 흥이 올랐다.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실내 인테리어와 소품들은 아주 정교했고 취향을 저격했다. 결국 허영과 탐욕의 결과물인 것에 마음이 동해버리는 걸 보니 나도 어지간히 그런 부류의 인간이구나. 궁에 서민들의 생활상을 담은 그림이 많은 건 뜻밖이었다.

궁 뒤쪽 글로리에테가 있는 언덕을 오르니 헬브룬 궁전 뒤로 비엔나 시내가 펼쳐졌다. 오스트리아는 체코보다 좀 더 톤 다운되고 모던한 느낌의 도시였다. 체코에서는 '다시 여행하러 오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면 오스트리아에서는 '이 나라의 어느 도시든 상관없으니,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여행지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이제 다시 회사란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을 꽤 좋은 것들로 채웠다. 돌아가면 다시 바닥을 향해 가겠지만 이제는 전보다 덜 빠르게 소진하고 더 빠르게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점심으론 립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는데 직원이 안에 앉을지 테라스에 앉을지 묻기에 안에 앉겠다고 했더니 그가 크게 웃으며 "No!" 했다. 테라스 정원이 아주 예쁘니 밖에 앉아야 한다며.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어께-이." 하고 밖으로 나갔더니 직원의 말처럼 예쁜 공간이 있었다. 답정너였지만 그럴 만 했으니까 인정. 립 스테이크도, 둘 중 고민하다 직원의 추천으로 주문한 맥주도 맛이 좋았다. 벌이 자꾸 나타나 두려웠던 것만 빼면 아주 나이스.

식사 후엔 별 고민 없이 근처에 있는 레오폴드 뮤지엄에 갔다가 불안, 자기혐오, 타인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차 있던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그림에 정신과 에너지를 갉아 먹혔다. 실레가 어머니의 고향인 체코의 체스키를 그린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며칠 전, 내가 환한 볕 속의 체스키를 요정의 마을로 느꼈던 것과 달리 실레에게 체스키는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는 죽음의 도시였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대체로 바싹 말라 뒤틀려 있고 색채는 흙빛에 가까운데 그의 동거녀 발레리와 아내 에디트를 그린 그림은 밝고 화사했다. 특히 밑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로 표현된 발레리의 얼굴은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안에도 빛이 있었지만 스스로 밝힐 힘은 없었던 거다.

뮤지엄을 나와 급격히 흐물흐물해진 몸과 정신을 붙잡고  충전을 위해 카페 자허에 갔는데 웨이팅 줄이 아주 길었다. 기다려도 되는 건지 확신 없는 마음으로 웨이팅 대열에 합류했는데 생각보다 줄은 빨리 줄어들었고, 시트 사이에 살구잼이 들어간 초코케이크인 자허-토르테는 보통의 초코케이크였고, 카푸치노는 이전에 마셨던 것들보단  밍밍했다. 당이 떨어진 와중에도 잊지 않고, G가 한국에서부터 데려온 치미 미니 피규어를 테이블 위에 놓고 후다닥 사진을 찍었다. 너의 나날들이 대체로 아름답길. 축하해, 생일!








카페에서 나왔을  이미  시가 넘은 시각이어서 미술사 박물관은 내일을 기약하고 모네와 피카소의 작품이 있는, 카페에서  블럭 거리의 알베르티나 미술관에 갔다. 모네의 그림을  생각에 너무 신이 나서 절로 어깨가 들썩였다. 사진도 그림도, 눈으로 직접 보는 모든 것도. 빛이 극대화된 장면을 이길  있는 건 없다.

정원이나 수련 그림에 압도될 준비를 잔뜩 하고 전시장에 들어갔는데 예상치 못하게 <The red kerchief portrait of madame monet>란 제목의 그림 앞에 서자마자 눈물이 차올랐다. 300여 년이란 시간과 카미유를 보고 있었을 모네의 시선, 액자  캔버스를 지나 그림  문밖 겨울의 공간에서 겨울의 얼굴의 한 카미유의 얼굴을 한참 응시했다. 거의 음영으로만 표현되다시피   표정이 너무 아려서. 영문 설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 숙소에 돌아와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  그림을 그릴 무렵 결혼 생활에 대한 모네의 불만이 커졌고, 그의 아내 카미유도 아프기 시작했다. 서로를 보고 있고 분명 사랑하는데 자꾸만 어긋났던 시기였다고. 모네는 죽을 때까지  그림을 팔지 않고 소장했다고 한다.

피카소의 그림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조금 빠르게 지나쳤는데 그림자에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물론 그의 작품 세계가 대체로 보편적이지 않지만) 어두운색이 아니라 노란색을 사용한  인상적이었다. 샤갈의 그림들 앞에선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전시를   떠올랐던 감상들은 결국  가지 생각으로 귀결된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하고 싶은 걸까.





빈의 거리에는 다정하게 가벼운 입맞춤을 나누는 연인들이 많아서 좋았다. 사랑스럽기도 하지! 저녁거리를 사러 빈 중앙역 안에 있는 마트에 갔는데 너무 붐벼서 어제 갔던 다른 마트에 갔다가 허탕을 쳤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가 늦은 8시쯤이었는데 토요일엔 6시에 문을 닫는단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일요일은 아예 열지 않고. 이러다 저녁부터 내일 아침까지 굶게 될 것 같아서 조급한 마음으로 다시 역에 있는 마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나라와 무척 대조적인 상황에 당황하긴 했지만, 이런 식이면 괜찮은 삶을 살 가능성이 조금은 더 커지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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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