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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KNACKHEE 2019. 7. 12. 01:36


나는 계획이 없었다. 늘 절박하지 않을 정도로 하고 싶은 것과 그날의 내가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일들이 있을 뿐이었다. 미래가 불안한 날도 있었지만 살아 있는 상태라면 뭐라도 하고 있겠거니 하는 막연한 낙관이 더 컸다. 그래서 항상 미래의 모습을 묻는 말에 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알 리가,라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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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기준이 낮은 사람인 건지도 모르겠다. 초등학생 땐 대체로 반에서 2등을 했다. 엄마는 펄펄 뛰었고 나는 그 앞에서 죄송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실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중학생 때는 전교에서 14등을 했다. 엄마는 또 혼을 냈고 나는 또 죄송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마찬가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등학생 때는 겨우 심화반 끄트머리에 들어갈 정도의 등수를 유지했다. 엄마는 정말 곤란해하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가계가 몰락한 후로 더는 내 등수에 쓸 한숨이 없어졌고 나는 늘 그랬듯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학교 성적표에는 비가 내렸다. 이번엔 엄마 대신 취업진로처 교수님이 곤란한 얼굴을 해보였다. 나는 민망한 웃음을 웃어 보였지만 실은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나의 어떤 숫자 앞에서 곤란해하며 이러면 갈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언제나 어딘가에서 무엇인가를 했다. 어느 시기에든 어떻게 준비를 해서 얼만큼의 목표를 달성하고 무엇이 되어야지, 하는 계획은 세운 적이 없다. 그냥 해야 하는 것들을 너무 하기 싫지 않은 만큼 했다. 그거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그래서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건가 싶은데, 그래도 뭐.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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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하고 싶은 건 자주 모양을 바꿔가며 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교실 앞문에 붙은 직업표를 보고는 출판기획편집자가 되어야지, 하고 국어국문학과에 갔다. 뭔지도 모르고 책과 관련된 일이겠거니 싶어서 내가 가진 정보와 선택지 안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을 했던 거다. 대학교에 가서는 그냥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는 만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이해했다. 출판사는 신입을 거의 뽑지 않으며 출판예비학교를 통해야 그나마 발가락이라도 담궈볼 수 있는 판이라는 걸 졸업반이 가까워져서야 알았다. 출판예비학교에 지원하려면 독서 이력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동안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기록해둔 것들이 그대로 자료가 됐다. 서류를 통과하고 필기를 통과하고 면접에서 떨어졌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과정이었고 내년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졸업은 했고 가계는 계속 기울었다. 돈이 급했다. 졸업반 때 출판이랑 비슷한 농도로 관심을 뒀던 게 잡지였다. 출판사와 잡지사에 이력서를 넣으면 잡지사에서만 연락이 왔다. 그래서 잡지사 들어갔다. 5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잡지사 둘, 사보 회사 하나, 엔터테인먼트 하나, 소셜미디어 대행사 하나를 거쳐 올봄, 출판사에 들어갔다. 신입으로. 앞의 경험들이 없었다면 얻기 어려웠을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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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건 게으를지언정 꾸준히 했다. 그리고 신을, 그분의 성품을 믿었다. 자주 의심하고 흔들렸지만 그분이 아니면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엔 부재해 결국 손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전히 계획을 묻는 말엔 내어 줄 답이 없다. 다만 언제나 내 생각을 뛰어넘어 일하시고 내 욕심으로 잘못 갔던 길조차 최선의 방향으로 사용해 주시는 그분을 신뢰하려 두 손을 모을 뿐이다. 한 치 앞의 계획도 없지만 내 삶이 내 삶으로만 끝나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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