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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ACKHEE 2022. 10. 21. 19:22

좀체 무언가에 흥분하지 않는 우리 팀 큐레이터님이 타데우스 로팍의 '안젤름 키퍼'에는 감탄을 숨기지 않으시길래 전시가 끝나기 직전에 발도장을 찍었다.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이 너무 없어서 지금 이 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는 없고, 일단 리서치를 한 다음에 다시 찍어온 사진들을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9월 초, 프리즈를 다녀온 이후부터였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또 어디로 갈 수 있는지 방향을 잃은 것 같단 기분이 지속됐다. 나의 모든 것이 너무 애매했다. 이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접속만 하면 이 분야의 소식이 쏟아지게 세팅해둔 인스타 본계정을 두어 달간 방치했다.
몇 주 전, 업무를 하면서 작은 아트페어에 부스로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 5일 내내 자리를 지키면서 다시 생각했다. 나를 배제한 채로 무턱대고 멋진 것을 동경하지만 하는 버릇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었네, 하고. 내가 도달하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는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로 성급하게 마음부터 내던진 거다.
이렇게 발을 땅에 붙이지 못하고 부유하기만 하는 시기에는 대부분의 것들에 무감해진다. 아름다움 앞에서도 호들갑 떠는 법을 잊는다. 리너스 반 데 벨데의 작품을 보면서도 마음이 원하는 만큼 일렁이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다. 분명 이 이상으로 좋아야 하는데.
함께 갔던 H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절반도 알아채지 못했을 테다. H님의 시선은 작품들 하나하나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마치 작품을 보며 자신의 이야기 속을 유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H님의 발걸음과 나눠주시는 감상을 가이드 삼아 다시 작품들을 마주했다. 성실하게 기본을 지키는데 지루하기는커녕 이 사람의 오늘을 들여다보며 어제와 내일을 궁금하게 만드는 그런 그림들.
그리고 작품 만큼이나 작품의 배치가 좋았다. 이렇게 커다란 크기의 작품들이 위아래 양옆으로 가까이 붙어 있는 배치는 페어가 아닌 전시에서는 거의 처음 보는 것이었다. 층고가 높은 공간과 작품 자체의 레이아웃 때문인지 거대한 책의 세상으로 들어온 소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크기와 색감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썩 좋았고 그렇게 강렬한 색들이 별다른 여유 없이 붙어 있는데도 소란하지 않다는 게 또 신기했다.

나의 작은 마음 탓에 작품의 감상이 어려운 시즌이라면, 작품을 공부라도 해야지 싶었다. 일단은 그렇게라도 작품의 독자로 지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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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상속자들>을 열심히 보고 있다. 1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자되는 밈들의 원본과 맥락이 궁금해서 보기 시작했다. 최근 트위터에서 먼저 열심히 본 누군가가 유머에 진심을 더해 써놓은 감상에 영업을 당한 탓이기도 하고. 김 탄이 생각지도 못한 순하고 살가운 캐릭터라 놀랐다. "너 나 좋아하냐"가 2회차에 나오는 대사라는 것도. 캐릭터 중에서는 영도 혼자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다른 캐릭터들은 진짜 평면적이고 이변이 없는데 그래서 재미있지 뭐. 그러다 자신의 최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깨달은 김 탄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데 그런 장면들이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마음이 아팠다. 나는 이제 무너져내리는 감정이 뭔지 안다. 그게 극에 달했던 올 상반기의 마음들이 떠올라 하마터면 울 뻔했네. 잘 참았지 뭐. 그리고 카톡이 ppl로 들어가 있는 거 너무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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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뉴스레터 구독자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오픈채팅방이 있는데 한번은 누군가가 메일 발신인에 뉴스레터+에디터로 표기되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취향이 아닌 특정 에디터의 이름이 뜨면 열어보지조차 않는 때가 많다며 뉴스레터 이름으로만 발신인을 표기할 것을 "제안"했다. 벌써 두어 달이 지난 일인데 불현듯 이 텍스트가 생각나곤 한다. 모든 생각이나 제안이 꼭 발화될 필요는 없을 텐데. 발전을 위한다는 애정이 무례와 상처가 될 수도 있는데. 그러면 또 아는데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악역을 자처한 거란 식으로 말하겠지 뭐. 그렇다면 운영진에게 따로 이야기를 하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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