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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의 B

KNACKHEE 2017. 12. 22. 23:14

 

 

 

고단한 하루를 보낸 B와 구슬모아당구장에서 최랄라 작가의 전시를 봤다. 붉은 공간은 힙했고 사람들은 전시장 내에서 파는 맥주나 커피를 손에 들고 곳곳에 비치된 소파에 앉거나 정해진 방향의 동선 없이 움직이며 전시를 관람했다. 개인 작업에선 겨울의 느낌을, 상업용 작업에선 여름의 느낌을 받았다.

 

 

 

예상한 것보다 조금 더 걸어 알프 키친을 찾았다. 아담하고 다정한 공간이었고 음식은 훌륭했다. 나야 미각이 뛰어나지 않아 그렇다 치지만, 내 기준 미식가인 B가 흡족해 해서 아주 기뻤다. 우린 2/3가 됐지만 늘 하던 대로 다가올 해의 목표를 말하고 서로에게 덕담을 해줬다. B는 바이올린 등의 악기를 배워 생활에 활력을 얻는 게 목표라고 했고 나는 꼭 필요할 때만 죄송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사실 주고받았던 덕담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B가 내게 지난해보다 덜 치열하게 사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고 했던 게 인상적이었다. B의 눈에 비친 나는 늘 일에 있어서 해내지 못할까봐 걱정하고 더 잘 하고 싶어서 고민하는 사람이었는데 올해는 사람 때문에 힘들어했을지언정 일에 있어서는 그냥 하면 할 수 있다는 그런 자세였던 것 같아서 좋았단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열심히 봐 주고 있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한가롭고 아늑한 밤이었다.

 

 

덧. 집에 가는 길에 작년에 나눴던 다짐들을 꺼내봤다. B는 지금의 직장에서 2년 차가 되는 것과 사랑을 할 거라는 목표를 모두 이뤄냈다. 나는 보편적 회화가 가능한 수준의 영어 공부에도 내 잡지 발행도 모두 실패했다.

 

또 덧. 이 모임에 대한 글을 인별에 올린 후 자리에 없었던 1/3이 결국 나를 언팔했다. 솔직히 나는 카톡도 전화도 씹힐 대로 씹힌 상태였으므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나도 팔로우를 끊었다. 내가 성의 없다고 생각했던 생일 선물에 대해 말했던 게 기분 나빴던 거라면 어쩔 수 없다. 아니 그리고 설령, 본인은 고심해서 준 건데 내가 그런 식으로 나온 게 마음에 안 들었다면, 그렇지만 나란 사람과의 관계를 계속 가져가고 싶었다면 내가 했던 연락들 중 하나는 받아서 뭐라고 되받아치든 풀든 했어야 하는 건데 그애는 그러지 않았다. 여기까지인 거다. 서로 맞지 않는 관계를 너무도 오래 끌고 왔다는 생각이다. 대학 때부터 줄곧, 내가 먼저 이 관계를 챙기고 연락을 하지 않으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해 왔다. 가끔은 왜 항상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너는 연락을 하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렸던 적도 있다. 그때 그애는 자기가 먼저 연락하는 성격이 못 된다는 류의 말을 했다. 아니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연락하는 성격인가? 아니면 커가면서 어떤 환경에 의해 그런 성격이 형성되나? 결국 마음의 문제이고 의지의 문제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됐다. 오래 봤다. 이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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