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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나눴다, 포장 없이

KNACKHEE 2018. 10. 29. 22:44

아홉수를 앞두고 백수가 돼 떠나는 동유럽 여행_04

 

S에게 주고 싶어 연한 분홍색 장미 한 송이를 샀다. 하루분 정도의 휴대용 물통도, 리본 장식도 없이 종이 포장지에 둘둘 말아줬다. 거창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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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교회들은 전부 숙소에서 한 시간 이상 걸리는 곳에 있었다. 현지교회에 가보고 싶기도 해서 근방 교회를 찾았지만 가톨릭교회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숙소에서 십오 분 거리에 있는 선교교회를 발견해 두 시 예배를 염두에 두고 오전 쇼핑에 나섰다. 주일을 예배가 아닌 다른 일정으로 시작하는 게 처음이라 어색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벼르던 뜨르들로(TRDLO)도 사 먹었는데 아이스크림 옵션을 선택했더니 포장지 사이로 빵의 열기에 녹은 아이스크림이 흘러서 벤치에 정착해야만 했다. 그 뒤로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뜨르들로를 든 사람들을 유심히 보게 됐는데 아무래도 좀 별로인 곳에서  먹어 발생한 참사였던 것 같다. 아이스크림을 밑바닥까지 꽉꽉 채워줘서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나자 이미 배가 불러 빵은 반을 겨우 먹었다. 뜻밖의 이른 점심.

체크 패턴은 건장한 내 체형을 더 확장돼 보이게 하고 어쩐지 단정하지 않은 느낌이라(무엇보다 안 어울린다.) 눈도, 손도 잘 가지 않는 편인데 ZARA TRF 라인에서 나온 붉은 타탄체크 롱코트에 마음을 뺏겨버렸다. 여행 내내 들고 다닐 엄두가 안 나서 머뭇머뭇하다 일단 입어나 보자, 하고 걸쳐보니 마음 정리에 도움이 됐다. 이렇게 안 어울릴 수가. 그런데 사실 걸어 두고 보기만 해도 좋을 것 같을 정도의 마음이어서 이너가 스트라이프라 그런 게 아닐까, 검은색 이너를 받쳐 입으면 괜찮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계속 맴돌았다. "아, 어떡하지, 너무 속상한데-"를 연발하다 ",... 마음 정리해야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혼자 사랑하고 혼자 이별했다. 헝가리나 한국에서 만나면 관상용으로라도 살 것 같다.

서점엔 모르는 글씨가 한가득이었지만 종이의 향만으로도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여름의 습기와 겨울의 찬바람, 손님들의 애정과 머뭇거림이 스미고 먼지떨이로 털어내도 매일 조금씩 쌓이는 먼지들이 만들어내는 그런 향.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영어 문학책 코너에서 그나마 읽을 수 있는 것들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중세에 연금술사들의 화약 창고로 쓰였다던 화약 탑은 어제 저녁에 보고 멋있다고 감탄했으면서 오늘 또, 어제만큼의 감탄을 내뱉었다.

 

두리번거리고 딴짓하며 걷기 대마왕이라 예배까지 넉넉할 줄 알았던 시간이 조금 촉박해졌다. G의 쇼핑 짐을 숙소에 가는 S에게 부탁하고 숙소 옆 동산을 가로질러 부지런히 걸었다. 준비 찬양을 할 때까지만 해도 문제가 없었는데 광고 영상이 나오는 순간 쎄-한 느낌이 왼쪽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를 검색해 보니 다락방교회인듯했다. 프라하 시내에 한인교회는 하나도 없는데 이단교회가 있다니. 열 명도 안 되는 작은 규모였지만, 그래도. 적잖이 당황했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아 G에게까지 폐를 끼치게 돼 속상하고 눈치가 보였다. 바로 그곳을 나와 어제 방황하다 본 인스타 감성 가득한 카페에 들어가 각자 유투브로 예배 영상을 봤다. 지난 부산 여행 때 인상적인 메시지를 들었던 게 생각나 수영로교회 채널에 접속했다. 진실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 세상에 불순응 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빛이 빛 속에만 있으면 존재 가치가 없으므로 어둠에 들어가야 한다.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 다원주의 등이 스미는 것을 경계하면서. 특히 개인주의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내 취향'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서 흠칫했다. 동시에 요즘 덕질과 함께 빠져 있는 'LOVE YOURSELF'나 'LOVE MYSELF'도 어떤 부분에선 경계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레모네이드 메뉴에 있어서 당연히 시원한 음료일 거라 생각하고 시킨 음료 두 잔이 모두 따뜻한 차여서 당황스러웠다. 오늘의 햇볕은 열심히 걸어온 우리의 아우터를 벗기기 충분했는데. 여러모로, 미안한 마음을 담아 G에게 음료를 대접했다. 카페는 자연주의 화장품을 같이 파는 공간이었는데 전체적으로 핑크&화이트 톤에 한쪽 벽면은 꽃밭이었다. 사람들은 벽면 옆 테이블을 주시하고 있다가 테이블이 비는 즉시 자리를 옮겨 사진을 찍곤 열심히 어딘가에 업로드하는 것 같았다. 체코 젊은이들도 나만큼이나 인스타와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틀간 쉼 없이 걸었더니 허리에 무리가 가서 댄싱하우스까진 트램을 탈 생각으로 숙소에 가는 G와 헤어졌는데, 교통권을 사러 가다 보니 볕도 좋고 펼쳐진 풍경이 아늑하고 느긋해서 계속 걸었다. 구글맵의 시간에 맞추지 않고 내 속도대로 두리번대며 걷다가 공원에 앉아서 노래도 듣다가 하면서 쉬엄쉬엄 가니, 아무 문제도 없었다. 관련 전공자가 아니라서 댄싱하우스에는 무감했고, 이름이 있겠지만 이름 모를 다리를 왕복하며 본 프라하성과 카렐교의 풍경이 정말 좋았다. 해가 지는 시점이라 물의 표면 위에서 황금색 석양이 춤을 췄다. 두어 걸음 가다 멈춰 서서 바라보고 서너 걸음 걷다 멈춰 서서 감탄하기를 반복했다.

 

노을을 보려고 G와 비셰흐라드 전망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강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에 자꾸 발목이 잡혀 예상 도착 시간보다 두 배나 더 걸렸다. 도착했을 땐 날이 흐려 이미 구름 속으로 해가 언제 져버렸는지도 모르게 들어간 후였다. 날이 추웠는데 의도치 않게 G를 오래 기다리게 한 꼴이 돼 버려서 또 미안해졌다. 온종일 미안하네.

돌아가는 길엔 정말로 더 걸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이번에야말로 대중교통을 타자, 하곤 지하철역에 갔다. 플랫폼 방향이 헷갈려 막 지하철에서 내린 아저씨를 붙잡고 물어봤는데 Excuse me, 하는 순간부터 무표정했던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띠고는 자신의 짧은 영어를 답답해하다 아예 다시 플랫폼 안으로 들어가 반대편으로 가는 계단의 위치를 알려줬다. 고마워라! (체코의 대중교통은 불시검문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 외엔 자율과 신뢰에 맡기는 편이라 플랫폼 출입이 자유롭다.)

 

숙소 스태프가 추천해준 버거집에 S도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진짜! 진짜! 맛있었다. 심지어 주문을 잘못 넣어서  모두 라지 사이즈가 나왔는데 거기에 감자튀김, 300cc 맥주  잔을 더해도  사람당 22,000원 정도밖에  나왔다. 감탄. 코젤다크는 짭조름하니 맛있었고 탄산이 세지 않아 목넘김이 좋았다. 이거지.

S는 인생의 좌우명이 있느냐 물었다. 종교적인 거라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는데, 하고 뜸을 들이고는 나한테 집중된 내 시선을 타인에게로 돌리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너무 중요해서. 말하고 보니 그렇게 종교적인  아닌  같기도 해서 속으로 잠깐 갸웃, 했다. S는 오히려 자신에겐 남이  중요한 게 문제라고 했다. 이 친구는 어렵지 않게 모든 사람과  어울리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미안해졌다.

  얘기가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죽음을 생각했던 지난날들과 체코에 처음 도착했을  울컥했던 감정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건 열심히 쓰는 블로그 일기에도 적지 않았던  같은데, 퇴사 직전엔 퇴사가 원인이 아니라 그동안 퇴적된 부정과 가족과의 감정이 극에 달해 반나절 동안 삶을 마감할 방법을 찾아봤다. 여러 방법을 접하다 보니, 작년 연말에 그렇게 가버린  아이가  그 방법을 선택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S는 자신도 내일이 기대되지 않고 삶이 무료해 우울증이 찾아왔다고, 그래서 떠나온 것도 있다고 말했다.

몸이 피곤했던 우리는 맥주  잔에 기분 좋게 취했고, 숙소에 돌아가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들었다. '방백'을 알고 있길래  최애   명이 진기라고 고백했다. S는 자기도 그렇다며, 샤이니를 좋아하는 사람을 보는  오랜만이라며 놀랐다. 분위기를 타서 샤이니 노래들로 선곡을 바꿨고, 플레이리스트의 끝에서  번째 곡이었던 태민의 'ACE'가 시작될 무렵 S는 잠이 들었다. S가 잠들기 전, 캐리어에 넣어  김성중 작가의 소설집 『국경시장』을  페이지인 보라색 색지에   적어 선물했다. 책을 챙겨오지 않았다며 계속 아쉬워하길래. 부디 취향에 맞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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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