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Bossanova,
97.2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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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논문이 남았지만 일단 수업은 끝. 남들이 회사 다니면서 대학원도 다닌다고요? 와, 진짜 대단해요, 할 때마다 "대학원은 돈 내면 누구나 다닐 수 있쬬! 그리고 그냥 수업 듣는 건데요, 뭐." 했지만 사실 진짜 빡쎘다. 일주일에 두 번은 퇴근 후 수업으로, 또 두 번은 운동으로 일정이 고정된다는 자체가 쉽지 않았고 주말에 과제를 위해 시간을 빼야 하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조별과제 무임승차는 대학원이라고 다를 게 없었고. 사실 제일 어려웠던 건, 공부를 만족스러울 만큼 할 시간이 없다는 거였다. 뭐 이래저래 쉽지 않았고 아쉽기도 하지만 어쨌든 끝. 그리고 논문 포기하면 언제든 빠르게 졸업도 할 수 있다. 일단 하는 데까지 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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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의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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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님이 선물해준 램프는 일 년여 동안 위시 리스트에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받았을 때 더 기뻤고 볼 때마다 흡족하다. 그 작은 램프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침대 위 물건들을 보는데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았는데도 행복한 거. 이런 류의 행복이 너무 오랜만이라 좀 이상했다. 체감상으로는 블타바 강 이후로 4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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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상담을 마치고 기억 나는 대화의 조각들.
3월에 다녀온 세 개의 콘서트와 최근 다녀온 두 개의 콘서트를 보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의 변화된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3월에는 '콘서트 정말 좋았지. 그런데 내일은 또 어쩌지?'의 마음이라 좀 당혹스러웠는데 이번에는 '콘서트 진짜 너무 즐거웠다. 잘 지내다가 또 콘서트 보러 가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변화는 썩 마음에 든다.
회사 일에 전력을 다하지 않고 야근을 하면 할 수 있는 일도 업무 시간 내에 할 수 있는 80%만 하고 20%는 내일로 미루고 있는 요즘에 대해서도 말했다. 논문도 쓰지 못하면 실패자가 될 것 같았는데, 1년 동안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안 되면 그냥 수업 졸업을 하기로 마음을 다잡고 있다고도. 당장의 이직이 쉽지 않고 이직 초기에 들일 에너지를 다시 만들 자신이 없어서 지금의 곳에 더 있기로 결정한 후에는 회사 사람들에게도 이전보다 경계를 풀고 다가가고 있다는 얘기도 했다. 선생님은 이것도 그냥 된 게 아니고 여전히 전력을 다할 수 있지만 장기전을 위해 절제하는 훈련을 스스로 하고 있기에 얻어진 결과일 거라고 하셨다. 전력을 다하는 일은 이미 훈련이 잘 됐으니 지금 하는 걸 잘 해서 둘을 병행해보자고.
만났을 때의 침묵이 불편한 것에 대해서도 선생님에게 털어놨다. 만나서 내 얘기만 하게 되면 나의 패만 다 까발려지는 느낌이다. 나 그거 안 좋아하거든. 게다가 아주 높은 확률도 말이 없는 상대는 리액션도 없어서. 내가 침묵을 메우기 위해 까발린 패에 대한 상대의 생각은 영영 알지 못하게 되겠지. 그러면 나는 또 그걸 신경 쓰는 데 내 감정의 일부를 쓰게 될 거고. 뭐 이런 얘길 하다가 이런 상황을 7-8여 년간 잘 넘겨오다가 이번 침묵을 유독 견딜 수 없어진 건 내가 힘든 시기를 지나며 '누군가에게 해도 괜찮은 내 얘기'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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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차를 내고 몇 학기 전에 수업에서 팀 과제를 함께한 P님을 만났다. 제주에 살던 분인데 남편의 직장 때문에 서울로 오셨대서. 그런데 아이가 있어서 내가 반차를 내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어서. 처음 만나는 사이였는데도 관심 분야가 같으니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림 얘기 하는 거 너무 좋다. 그러고는 동네 근처까지 와서 마침 시간이 맞길래 <헤어질 결심>을 봤지. 드라마에서 배운 정제된 단어들로 이어가는 대사들이 정말 우아했다. 서래가 '나는 왜 자꾸 그런 남자들이랑 결혼하는 걸까요,' 하는데 <월 플라워>의 샘이 생각나기도 했다. 마지막에 철썩이는 파도는 꼭 해준의 뺨을 때리는 것 같았고. 안개와 인공눈물을 넣던 뿌연 눈으로 이어지는 장치가 조금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고 외치던 말로까지 연결되는 게 소름끼쳤다. 와. 진짜 장면, 아니 단어 단위로 씹어먹고 싶었던 영화. 꼭 몇 번 더 봐야지. 그리고 기록해둔 대사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그것 참 공교롭네."
"참 불쌍한 여자네."
"난 해준 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왔나 봐요."
"나는요, 붕괴됐어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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