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Bossanova,
23,000여 점 본문
우리 원우.
날이 좋더라고.
"초일류 기업, 23,000여 점."
이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기증 작품 수와 이를 행한 대상에 붙은 수식어였다. 국중박을 나와 다른 전시를 보러 가서도 문득문득 생각이 나 "2만 3천여 점," 하고 맥락 없는 말을 소리 내 뱉었다.
같은 컬렉터의 작품으로 미술관과 박물관이 전시릍 구성하는 형식이 다른 점도 흥미로웠다. 기관의 성격에 맞춰 기증품의 종류가 다른 탓도 있겠지만 미술관은 좀 더 공시적이고 박물관은 좀 더 통시적인 듯한 너낌적인 너낌. 후자가 전시 타이틀에 맞춰 방 세계관 열심히 쌓아 올린 것도 정말 박물관스럽다고 생각했다. 역시 역사는 내러티브지.
박래현 작가님 작품은 이변 없이 좋았고 모네 아저씨의 작품은 지나고 나니 저 사이에 있던 게 좀 뜬금 없이 느껴졌만 초등학생 때 가장 처음으로 좋아하게 돼 열심히 책을 찾아 읽었던 작품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불국설경>은 공간 밖에서 보는 순간 "와, 겨울!" 하는 탄성이 나왔다. 진짜 좀 서늘해졌고.
이렇게 색 대비가 적은 유영국 작가님의 작품은 좀 생소했다. 5년 전 미친 팀장의 행적에 대해 진술서를 쓰고 일주일의 위로 휴가 비슷한 것을 받았을 때 밤산책을 하며 마주한 인공 호수의 풍경을 닮아서 자꾸 눈이 갔다.
이중섭 작가님의 풍경화도 정말이지 생소했고 장욱진 작가님의 작품은 언제 봐도 여유로워서 좋았다. 이인상 작가님의 <나무 아래 한가로운 담소>는 제목부터 너무 취저. 이 작품에서 처음 접한 '제발'과 '제시'의 개념도 즐거웠다. 운치 있고 다정하기도 하지.
사실 모종의 이유로 시장이나 공공기관에 나오는 슈퍼리치 컬렉터들의 컬렉션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자료를 좀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마침내'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지금 논문도 포기하고 싶어서 머리 굴리고 있는 판국이라 될지 모르겠네.
어- 이 공간에 대한 리뷰가 대체로 호평 일색이었던 것 같아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어느 지점에서 감탄해야 하는 건지 잘 캐치하지 못했다. 오브제에 압도당하는 느낌도 아니었고 방문객이 있으니 공간의 고요를 기대할 수도 없었고. 이날 전시 메이트였던 G가 포스터를 보며 "저거 꼭 너만 없으면- 시리즈 같아," 했던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어서 와, (나야.) 평창동은 처음이지?
종종 어떤 기억은 머리가 아닌 몸에 각인된다. 특정 순간을 떠올렸을 때 당시의 풍경이 아니라 심장이 동작을 멈춘 듯 차가워지던 손끝, 눈 밑의 미세한 떨림, 애써 끌어올린 입꼬리에서 느껴지던 저항감 같은 것들을 예로 들 수 있지 않을까. 한차연 작가에게는 2층 전시 공간에 있던 <밤 드로잉> 작업이 그러한 순간들의 기록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드로잉들은 3차원의 오브제로도 같은 공간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연결점들을 생각하며 오브제들을 보니 그것들이 꼭 《해리포터》의 호크룩스 같이 느껴졌다.
이 전시의 감상은 책도 읽는 독서모임 '뜨거운생활'에서 친구들과 넷플릭스 다큐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오>를 보고 나눴던 혼란한 대화 녹취의 일부로 갈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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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알렉스는 이런 말을 했어. "사람들은 기억 상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요. 날 안심시켜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죠." 친구들은 기억과 정체성을 동일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해. 저번에 함께 읽은 《바디》에서 제일 강렬했던 것 중 하나는 우리 뇌가 아무나 들어가서 수정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 같다는 거였어. 내 기억이 아니어도 나의 정체성이 될 수 있는 거잖아. 누군가 주입한 기억도.
T ; 정체성이라는 걸 어떻게 정의해야 하지?
M ; (사전 찾아서 읽음)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T ; 알렉스는 사고 이후에 마커스가 들려준 가짜 기억을 가진 상태로 지냈잖아. 어렸을 때 상처받은 기억 없이. 그렇다면 그건 정체성이 변해버린 건가? 정체성을 결정하는 주체가 나인지 타인인지 사회인지 그 모든 게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건지 혼란스럽네.
J ; 존재의 본질이라,... 그런데 본질이라는 건 누가 만들어주고 경험한다기보다는 자기가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질문해서 답을 찾아나갔을 때 얻을 수 있는 거 아냐?
T ; 그럼 알렉스는 기억을 잃었으니까 질문하는 그 과정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나? 텅 빈 상태인 거잖아. 뭐라도 있어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가능하지.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회사에 와서 아직 아무 디자인도 안 했어. 그런데 누가 너는 어떤 디자인을 해? 하고 물으면 아직 아무것도 안 해봤으니까 대답할 수가 없잖아.
M ; 그래도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게 있잖아. 애기들이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지만 서로 다른 특성들을 보이는 것처럼. 그게 정체성에 포함되고 그 위에 경험이 더해져서 만들어지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기억=정체성'이라기 보다는, 그게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내가 태초부터 가진 어떤 영역도 있지 않을까 싶은 거야. 아니면 아예 유전적 요인까지 포함해서 생각해보면 어때? 뭐라도 기억과 정체성이 같다는 거에 반박하고 싶어.
J ; 일리는 있지 않나? 본질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들이 이후에 할 어떤 경험들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니까.
T ; 그건 그래. 예를 들어 흔치 않은 노란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애라면 어렸을 때 너 이상하다, 별나다 뭐 이런 소리를 들을 테니까.
M ; 성공했다!
T ; 그런데 그건 별나게 바라보는 시선을 당하는 경험이지 않아?
M ; 그러네. 졌다.
J ; 아니, 진 건 아니지. 소스가 되는 거잖아. 그게 없으면 그거랑 관련된 기억이 만들어질 수 없는 거니까. 앞으로 하게 될 경험이나 기억에 영향을 미치니까.
T ; 나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여러 개 꼽아도 된다면 다 포함해볼 수 있겠네, 기억에 한정하지 않고.
J ; 휴, 됐다. 좋아. 넘어가자! 다음 질문은-
_
전시와 같은 이름의 설치 작품 <In Memory> 는 한강 작가님의 《흰》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이라는 걸 전시장을 나오면서 알았다. 어차피 안 읽은 책이라 크게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서도 괜히 아쉬웠지 뭐야.
마지막 목적지를 남겨두고 미친 스콜을 만났고 정말 지구의 멸망이 성큼 다가와 있다는 걸 체감했다. 우산도 소용 없이 쫄딱 젖어서 눈에 보이는 대로 뛰어 들어간 세종문화회관에서 30분 정도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사실 너무 지치고 낡아버려서 아무 카페나 가서 뭐라도 먹고 싶었는데 마지막 전시는 나보다도 G가 보고 싶어 했던 거라 그냥 패스하자고 했다가 다시 양심을 챙겨 가보자,고 했다.
한지민 작가님 작품을 보러 간 거였는데, 유수지 작가님을 얻었고 김경렴 작가님의 〈물성연구 : 우냐〉가 정말 너무 취저였다. 유수지 작가님의 〈들키고 싶은 마음〉과 〈숨기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서로 맞닿아 있는 상태라면 무엇을 들키고 무엇을 숨기고 싶은 것일지 고민했다. 사실은 그 두 마음은 같은 모양이지 않을까.
그리고 케이크를 먹다가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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