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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LOG

지금 쓴 힘 기억했다 이따가 또 쓸게요

KNACKHEE 2023. 7. 22. 21:30

 

이 전시는 꼭 평론집을 읽는 것 같았다. 드물게 평단의 인정과 대중적 인지도를 고루 갖춘 평론가가 자신이 정말 좋아한 콘텐츠와 대중의 관심을 우선순위로 두고 선택한 콘텐츠의 균형을 적절히 맞춰서 낸.
독자인 나는 평론가의 관점이나 문체에 대한 호감 정도로 책을 샀을 테니 평론의 원 콘텐츠를 모두 접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기에 종종 관심 없이 책장을 넘길 테고, 그러는 와중에 궁금해져 메모해두는 콘텐츠가 생기기도 할 것이다. 프랑수아 알라르가 사진으로 기록한 평론집에서는 고고 스키아파렐리의 공간 곳곳에 흔적을 남긴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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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 스키아파렐리(1890 - 1973)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코코 샤넬의 가장 큰 라이벌이자 만 레이, 살바도르 달리 등 초현실주의 아티스트들의 친구이며 딸 '고고(애칭)'의 엄마이기도 했던 패션 디자이너다. 중상류층 학자 집안 출신인 그는 결혼 후에는 파리에서, 이혼 후에는 뉴욕에서 지내다 다시 파리로 돌아왔고, 그 시점부터 그의 본격적인 패션 커리어가 시작됐다. 첫 창업은 실패했지만 꺾였음에도 그냥 하는 마음으로 디자인 개발을 계속한 덕분에 오늘날 그의 시그니처로 불리는 페이크 리본 스웨터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후 '오트쿠튀르에 지퍼를 사용한 최초의 디자이너',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최소의 여성 패션 디자이너(1934)' 등의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며, 타임지를 계기로 살바도르 달리와의 활발한 컬래버레이션이 시작됐다. 전화 다이얼 모양의 향수, 가짜 랍스터가 그려진 실제 전화기, 그 유명한 Shoe hat이 대표적인 예다. 사실 위트 넘치는 그의 디자인은 종종 패션계의 배척을 받기도 했지만, 예술가와 지식인들에게는 언제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달리와는 해골 드레스도 함께 제작했는데, 이는 당시 진행 중이던 제2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며 희생자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역할로도 기능했다. 시인 장 콕토,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화가이자 조각가인 메레 오펜하임과의 협업도 이어졌다. 이처럼 전위적이고 사회적 메시지가 있는 디자인을 선보이던 엘사는 디올의 New Look이 등장하면서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으며, 코코 샤넬이 복귀한 해에는 모든 활동을 정리했다.
그는 패션과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의 결합하며 최초로 하이패션에 재치를 더했다는 평과 패션이 예술과 동일 선상에 놓이도록 그 위신을 끌어올렸다는 평을, 그럼에도 과소평가됐다는 평을 동시에 받고 있다.(브랜드는 2012년 다시 시작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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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잘 드는 벽면에 '햇살, 전망, 현대성, 단순함'을 키워드로 지어진 빌라 노아유Villa Noailles를 배치한 것도, 늘 작업을 하느라 유랑했던 프랑수아 알라르가 팬데믹 기간 아를의 집에 머물며 찍은 공간에서 그의 싸이 톰블리 덕후적인 면모가 드러난 것도, 프랑수아가 사울 레이터의 집을 찍은 사진이 사울의 사진전이 열렸던 피크닉에 다시 전시됐다는 공간적인 맥락도 좋았다.
처음엔 사진 속 공간들에 와, 돈이 많으면 이런 걸 할 수 있구나- 했다가 이내 그런데 돈만 많으면 되는 일인가?에 봉착했다. 관심사와 취향과 안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 돈도 관심사도 취향도 안목도 있는 사람으로 나이들어야지. 그런데 이중에 돈이 제일 자신 없다.

 

 

카페에서는 창과 방패의 싸움을 귀로 관전했다. 2:1의 싸움이었고 1은 자기 브랜드 키우먼서 프리랜서를 하려는 사람이었다. 나머지 둘은 그냥 회사 다니는 것 같은데 스스로를 언니가, 언니들이, 이렇게 지칭하면서 젊꼰짓을 했다. 그래봤자 셋 다 이십 대 중반 정도인 것 같았는데. 언니가 안타까워서 그런다며, 네 브랜드 성과 안 나니까 거기 들이는 시간을 줄이고 알바나 계약직으로 프리랜서 포트폴리오 만들라고 계속 잔소리 하더라고. 1은 브랜드 일이 정말 많고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내가 시간이 많지 않다, 그리고 당신들이 말하는 루트와 내가 생각하는 프리랜서의 루트가 다르다, 지금 내 브랜드에 시간을 더 투자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들인 만큼 브랜드의 규모가 커지더라, 이것에만 집중해도 될까 말까인데, 하는 식으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해나갔다. 그러자 상대들 중 하나가 그러다 네 인생도 그것만 하다 될까 말까가 되는 거야, 하는데 조금 더 용기가 있었다면 진짜 애 좀 알아서 하게 두라고 소리칠 뻔했다. 두 사람든 자꾸 1이 이해가 안 된다고 했는데, 자꾸 자기 입장에서 남을 보면서 이해를 시도했다고 하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이해의 시도가 아니라 그냥 판단이지. 젊은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는 말에도 화가 났다. 자기 브랜드 키우려고 애쓰고 있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막말이야.

 

 

 

전시 제목 '보이지 않는 적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마치 투바투 노래 제목 같았고 부제인 '칼후의 북서 궁전 F실, 남동쪽 입구; S실, 남서쪽 입구'는 무슨 뜻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로판인가 싶고,... 작품을 들여다볼수록 '뭐지?' 했던 궁금증은 '미쳤다, 진짜' 하는 감탄으로 바뀌었다. 이 전시는 복원과 재현에 기반을 둔 창작이었다. 극과 극에 있는 개념을 이렇게 접목시키다니.


마이클 라코위츠는 전쟁으로 소실된 문화의 재현 작업을 지속해왔으며, 2018년부터는 ISIS가 파괴한 칼후의 북서 궁전을 복원하는 '보이지 않는 적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칼후의 북서 궁전)'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미국 내 아랍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아랍어-영어 신문과 중동 음식 포장재를 활용해 파피에 마세 기법으로 그곳의 벽화를 재현해냈다. 또 ISIS의 파괴 이전에 약탈되거나 분실된 부분들은 바닥에 소실 사실과 현재 그들의 소장처로 기재해두었다.


전위적이면서도 위트 있는 작품의 기세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구나. 불편하게 직설적이거나 메시지를 너무 함축해 그 본질에 닿기도 전에 지쳐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나 흥미로운 진정성이라니. 전시 설명문 말미에서 던지는 질문은 이 전시를 관통하는 물음 같았다.

"과거를 부정하지 않은 채 미래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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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시기마다 시간을 들여 걸어온 길을 톺아보고 편집해서 기록해두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시간과 정보의 축적에 불과할 뿐 헤리티지가 될 수 없다.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어떤 시기의 기록이고,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지루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해석이 더해져 또 다른 부분이 조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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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진짜 화가 너무 많고 가끔은 화가 나를 가르고 나와서 그물처럼 나를 휘감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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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중에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쓴 힘 기억했다 이따가 또 쓸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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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젠가의 콘에서 승관이가 했던 말이 자꾸 떠오른다. 이렇게 함께하고 무대를 하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민망해하며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했는데,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무대에도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단지 가수로서 춤과 노래를 열심히 또 잘 하는 것 외의 일들이 필요하다는, 그런 주변의 것들까지 열심히 해내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재계약이 단순히 멤버 모두의 의견 일치만으로 이뤄질 수는 없었던 일이었다고 했던 인터뷰와 맞물려 이런 식으로 생각이 들러갔다.

아니 그런데 이번에 세븐틴 콘 셋리 뭐야 진짜 미쳤다. 내 자리 없었던 거 너무 한이고,... 아니 진짜 뭐 추첨도 떨어지고 선예매 들어가도 눈밭이고. 하 진짜. 내새끼가 지금 시스루를 입었는데 ㅠㅠㅠ 역대급으로 에쁘고 역대급으로 끼부리는데 ㅠㅠㅠㅠ 좋아하는 노래들 다 해 이번에 ㅠㅠㅠ 그런데 사실 세븐틴 노래 대체로 다 좋아하긴 한다. 그렇다면 정정. 특히 좋아해서 한 곡 반복으로 들었던 노래들 이번 콘에서 다 해 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