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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LOG

찐 몬베베가 되어서 반차 내고 전시 네 개 본 새럼

KNACKHEE 2023. 8. 4. 13:09

 

 

매번 가입 시기 놓치다가 그냥 군백기라고 봐도 무방한 타이밍에 몬베베 가입한 새럼.

 

 

지하철 역 안에서 올려다 본 출구는 눈부신 공포였다. 아주 뜨겁고 습하겠지. 아니 그런데 UX 라이팅이 가장 필요한 건 정부 부처들인 게 아닐까. 보험도 그렇고. 너무 공표자 중심의 어휘와 표현들이라 진짜 안 읽힌다. 

 

 

WWF는 공간 자체가 재미있었고 밸런드 돌은 굿즈로 내줬으면 싶었다. 이대원 작가의 작품은 축제 같아서 좀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애들의 노래 중에 시차라는 곡이 있는데 사실 그건 잘 듣지 않았던 곡이라 전시를 보면서는 오히려 00:00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오설록에서 사치도 부리면서 연차 기분도 좀 내고. 오설록 중에 페이스 갤러리 옆에 있는 게 제일 분위기 있는 것 같다.

 

 

매튜 데이 잭슨의 작품에서는 탄 냄새가 났다. 고래 같은 바다 그림이 인상적이었고 아름다움과 공포 등 양극단의 요소가 지닌 모순적 동시성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해보고 싶었는데, 여기서 나는 이해를 미뤘으니 그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

 

 

흐엉 도딘의 예술은 빛의 탐구이자 자신과 타인 사이를 열어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러한 마음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수련의 과정 가장 끝에 있는 것이 찢겼다가 다시 새살이 돋은 듯 나 있는 선들이라는 것에 왜인지 눈물이 났다. 고통은 고통이기에 괴롭고 나쁘지만 생각지 못한 방식의 선善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을 믿는다. 그럼에도 괴로움이 그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작가가 자신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영상은 정말 좋아서 앉은 자리에서 세 번을 내리 봤다. 조각조각 받아 적은 것들을 덩어리로 기록해둔다.

"빛은 생명이고 밀도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보여주는 마티에르다. 투명도는 우리를 상승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비워내야 하는 것, 겪어온 모든 것을 보여준다. 모든 것 뒤에는 색과 밀도가 있다. 투명도는 공허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표구부터 안료 제작까지 모두 직접 한다. 시중에서는 나의 감정을 담아낼 안료를 찾을 수 없가 없다. 직접 만들기 때문에 메시지가 더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작업을 할 때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모든 기획이 있다. 그래야 작업 과정에서 기술적 어려움에 부딪히지 않을 수 있다. 어떤 프로젝트도 모험같이 느껴지거나 미지의 세계에 머물지 않는다. 작업은 메시지를 전하는 동시에 비워내는 일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전시 메인 이미지랑 타이틀만 보고는 갬성 에세이일 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일일 시트콤 각본집이었던 건에 대하여.

전시 서문에 있던 '소박한 형식과 비범한 아이디어의 절묘한 조화'는 이 전시를 가장 잘 묘사한 표현이었다. 작품들은 계속해서 감상자의 상상력과 상식에서의 탈피를 요구했다. 자꾸만 웃음이 나는 방식으로. 텍스트로 그린 풍경화가 인상적이었는데, '이게 되네'의 느낌으로 보게 됐다.
백조(백수)를 진짜 하얀 손으로 표현한 게 너무 즐거웠고, 그 조각을 지나 들어간 공간에 웬일로 <노란 비명>이라는 타이틀의 평범한 페인팅이 있길래 워- 무슨 일이야, 했는데 곧바로 평범하지 않은 영상이 나타났다. <노란 비명> 작업 영상이었고, 아니 진짜 미쳤어 ㅋㅋㅋㅋ 작가는 진짜 비명을 지르면서 캔버스 위에 색을 겹겹이 쌓아 나갔다.
심지어 '겁에 질린 비명, 짜증에 폭발하는 비명, 분노에 찬 비명, 못 견디게 혼란스러울 때 지르는 비명, 풀리지 않는 근심에 짓눌려서 결국 터져나오는 비명' 같은 식으로 감정마다 색을 다르게 섞어서 칠하는가 하면, 색을 칠하기 전에는 카메라와 아이컨택을 하고는 그 감정을 연기하기도 했다.
또 한참 절망적인 비명들을 지르며 색을 칠하더니 노랑에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며 오렌지 색을 섞어서 환희에 찬 비명도 지르는 게 아닌가. 언제까지? 화면에 활기가 생길 때까지! ㅋㅋㅋㅋ 비명 지르며 칠할 때 클로즈업 된 작가의 얼굴에서 종종 현타가 와 웃참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영상의 킬포였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는 맞은편에 있었을 스태프분들의 표정이 정말 궁금했다.


<자화상>은 움켜쥐고 닫아버려서 비어버린 곳들로 읽혔고 미로로 표현된 <무제 ; 친숙한 고통 시리즈>는 미로라는 장치와 고통이라는 감정이 직관적으로 얽혀서 다가왔다. 김연우가 부릅니다, 이별택시. 어디로 가야 하죠, 아조씨,...
전시를 보면서 그 언젠가의 국어 시간에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라는 챕터를 배우며 예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약속을 어기고 오브제들을 자신만의 단어로 바꿔 부르며(침대를 접시로 부르는 식) 결국 세상과 단절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사람의 이야기.
이런 사람이 혼자면 고립되겠지만, 다수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그 예시와는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어떤 약속은 권력 또는 다수의 폭력이기도 하니까. 일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왜'를 묻는 작업이고 그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 표면에 의문을 갖고 근본을 들여다봐야 한다. 여기저기서 부는 바람을 무시하고 폭우에 맞서는 동시에 주변과 어울릴 수도 있는 단단한 바위의 마음으로. 또 가능하다면, 함께 목표를 이야기할 바위 동료들이 있는 곳에서 왜 이것이어야 하는지 같이 궁금해해보는 거다.

 

 

녀름은 진짜 사진이랑 스크린으로만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