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Bossanova,

20150820-22_여행무식자들이 꾸역꾸역 성수기에 가는 제주도 여행 본문

TEMPERATURE

20150820-22_여행무식자들이 꾸역꾸역 성수기에 가는 제주도 여행

KNACKHEE 2015. 8. 29. 01:52

 

주변의 공기가 묘하게 들떠 있었다. 나는 그걸 감지하지 못했는데 엄마가 /너 지금 여행 간다고 신 나서 나한테 서비스 하는 거지?/라고 해서 알았다. 친구와 단둘이 가는 여행도 처음이거니와 이렇게 주도적으로 비행기를 예약하고 방을 잡고 하는 것도 처음이라 그렇다. 같이 스틴트를 준비하던 팀원들은 모두 갔는데 나만 가지 못해서. 머리로는 다른 뜻과 인도하심이 있겠지, 하며 받아들였지만 속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서 어디든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마침 K가 함께 가 준대고. 가자, 하곤 바로 그 주에 만나서 계획을 짜고 그 다음 주에 진짜 떠났다, 우린. 맙소사. 사실 K와는 알고 지내는 내내 어딘가에 /가자/고 말은 무수히 많이 주고받았었는데 정말 이렇게 떠난 건 처음이라 얼떨떨한 기분이기도 했다. K는 일단 티켓을 끊으면 어떻게든 가게 돼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정말이지, 시작이 반인 게 맞다.

 

오후 비행기로 가서 아침 비행기로 오는 일정이어서 1박 2일과 같은 2박 3일이었다. 집을 나서기 한 시간 전에 크지 않은 배낭에 여행 짐을 싸면서 신제품 출시 알림 때부터 눈여겨 보고 있는 마리몬드 백팩이 눈앞에 선했다. 갖고 싶다, 너란 백팩. 공항으로 가는 중에 우리가 탈 비행기가 30분 지연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K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그래도 내가 일찍 도착할 것 같으니 원래 만나기로 했던 시간에 맞춰 와서 나랑 놀아달라고 했다. K는 그러마, 했고 그렇게 둘 다 일찍 도착한 덕에 한 시간 앞의 비행기로 바꿔 탈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럭키. 비행은 즐거웠다. 이륙의 느낌이 좋았고, 비행은 꿀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편안했다.

 

 

제주 공항에 도착해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밀려오는 습기와 보이는 이국적 식물에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둘 다 면허가 없어서 대중교통을 잘 이용해야 했는데, 첫 버스부터 실수했다. 덕분에 그 뒤론 버스의 행선지를 확인하고 타는 데 주의를 기울여 더는 실수하지 않았고, 또 덕분에. 제주에 있는 내내 택시를 타는 일은 두 번밖에 없었다. 한 번은 둘째 날 궂은 날씨에 미리 지치지 않기 위해서 아침을 먹으러 가는 길에 탔고 또 한 번은 절대 시간 맞춰 도착해야 하는 집에 가는 날 공항에 갈 때.

 

 

제주에서의 첫 식사는 흑돼지. 굉장히 유명한 집이라던데 운이 좋았는지 저녁 식사 시간 때 갔음에도 웨이팅은 십여 분 정도. 출발이 좋다,고 생각했다. 회식 자리에서 고기 굽던 스킬을 발휘해 이곳에 가자,고 한 K에게 풀 서비스를 했다. 이 구역의 고기굽이는 나야! 랄까. 냉면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음식이 맛있었고, 유명한 집이라 바쁜 알바생들이 의외로 친절해서 좋았다. 그렇지만 꼭 여기 고기를 먹어야 해!까지는 잘 모르겠고 제주에 왔으니 흑돼지는 먹어 줘야 하고 그렇다면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에 가서 나쁠 건 없으니, 정도. 정말 좋았던 건 이 다음인데, 바로 숙소. 저녁을 먹은 곳에서 숙소까지는 두 대의 버스를 이용해야 했고, 갈아타 버스는 55정거장을 가야 한다고 해서 우린 컬쳐쇼크를 받았다. 그래서 가만 생각해 봤는데, 수도권의 광역 버스의 개념이지만 고속도로 없이 정거장이 많은 버스 정도로 이해하면 그럴 만도 하지 싶었다. 숙소는 버스에서 내려서도 20여 분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여기야말로 정말이지 초행 길인데다 밤이 늦어 어둡기는 무척 어두워서, 게스트 하우스 블로그에 있는 설명에 의지해 길을 가면서도 계속 의심했다. 그런데 의심하면서도 계속 가다 보니 황홀한 밤 바다의 풍경과 소리를 마주했고, 나 있는 길을 따라 바다를 건너니 게스트 하우스가 나왔다. 신기했던 건, 다음날 이 길을 똑같이 걷는데, 목적지가 정확히 있음을 알고, 얼만큼 걸어야 하는지도 알고, 가는 길에 황홀할 만큼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아니 그 전날 만큼 멀게 느껴지지도, 캄캄한 길이 무섭게 느껴지지도 않았다는 거다. 그래서 또 생각했다. 일단 가면 되는구나. 의심을 하지 않을 순 없지만 어쨌든 일단 가면 뭔가 있구나. 여긴 원래 예약하려던 곳에 개가 있단 정보를 입수한 K가 재빠르게 다시 찾은 곳인데, 아주 성수기가 아니라 손님이 그렇게 많지 않고, 또 이틀을 묵을 거니까, 라며 4인실에서 2인실로 방을 업그레이드 해줬다. 스텝 언니도 무척이나 친절하고 화장실이며 방도 깨끗하고. 또 럭키.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려 기쁨을 감추기 어려운 상태가 됐고, 이곳을 찾은 K에게 /사랑해/라고 고백했다. 나는 다시 그 순간을 맞아도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고백할 거다.

 

 

우려대로 비가 와서, 다섯 시 반부터 해 뜨는 걸 보겠다고 씻지도 않고 앉아 있었는데 해는 보지도 못하고 힘차게 내리는 비에 걱정만 더했다. 이 비를 헤치며 어제 온 길을 다시 걸어 나가서 버스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아 콜을 부르고 느긋하게 나갈 채비를 했다. 다행히 우리가 나갈 땐 비가 많이 잦아들었고, 아침을 먹을 곳에 도착하자 해가 나기 시작했다. 또또 럭키.

 

 

아홉시 반 오픈이란 말이 무색하게 우리가 도착한 아홉 시에도 이미 몇 팀이 대기 번호를 받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더 여유 부렸으면 점심이 첫 끼가 될 뻔했다. 사실 해산물을 비롯한 비린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먼저 나온 전복죽은 그냥 그랬다. 심지어 내장이 풀어져 있는 거라 썩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나중에 나온 돌솥이 진짜 괜찮았는데, 전혀 비리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돌솥밥에 있는 고구마며 단호박이 혀 밑에 침이 고이게 했다. 비린 건 좋아하지 않으나 제주까지 왔으니 명진전복 정도는 가 줘야지, 한다면 죽보다는 돌솥을 추천하고 싶다. 풍성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버스 정류장을 찾아 동네 마실을 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있는 평대리는 당근마을이었다. 마을회관 가득 당근 그림이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우리가 기다리는 버스는 조금 늑장을 부렸는데, 막판에 K가 노래 한 곡 들으면 버스가 올 것 같아. 아침에 듣던 그 어어어- 하는 노래, 라기에 우리 규의 Kontrol을 플레이했다. 신기하게도 정말 노래가 끝나는 타이밍에 맞춰 버스가 왔다.

 

 

비자림은 우리가 처음 여행 이야기를 꺼내며 주안점을 뒀던 /쉼/에 가까운 곳이었다. 비가 오고 난 뒤라 걷기 좋은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적당히 해도 들어 무척 청명한 느낌을 자아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원한 내음이 코끝에 닿아 덩달아 눈도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우리의 /쉼/은 모두가 가는 우도에 가면서부터 흐려지기 시작했다. 일단 우리가 사전에 여행 책자를 통해 알고 있던 바에 의하면, 성산항에서 우도에 들어가는 배는 정시에만 있었다. 그런데 기본 2-30분을 기다려야 하는 제주의 대중교통으로는 정시를 맞추기가 어려웠고, 택시를 잡으려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검색을 했더니 성수기엔 정시가 아니어도 배가 자주 있는 편이라더라. 새로 얻은 정보 덕에 조급함을 버리고 기다려 버스를 탔다. 아침에만 해도 우도에 갈 수 있겠나 싶었는데 해가 쨍 하게 떠서 우도에 들어가는 배를 타고 있자니 또 괜스레 기분이 들떴다. 우도에서는 다음 단계의 /지침/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우린 면허가 없고, 버스를 타기도 애매하고, 그리 오래 있지도 않을 건데 자전거를 빌리기는 아까웠다. 목적한 하하호호카페가 걸어서 20분이라고 적혀 있기에 호기롭게 출발했으나 가 보니 실상은 30분이었고, 급격히 덥고 습해진 날씨 덕에 그 길이 더 길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카페에 갔다 배를 타러 나오는 길은 들어갈 때보다 더 짧다고 느껴졌으니 이것도 어제 숙소를 찾아 갈 때와 같은 마음이 작용한 것이겠지.

 

 

 

카페는 인기 만점이었고, 버거를 먹으려면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기에 포기하고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저녁 생각에 버거를 포기했으면서 지친 나머지 충동적으로 아이스크림을 두 컵이나 먹었다. 당시엔 두 컵을 먹고 나니 좀 느끼하고 배가 불러 두 컵을 먹은 걸 조금 후회했으나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그때 두 컵을 먹길 잘 했단 생각이다. 한 컵만 먹었으면 그때도 그러고 지금도 무척 아쉬웠을 것 같다. 우리가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테이블 뒤엔 잘 자는 고양이가 있었다. 고양이는 고르게 몸을 부풀렸다 가라앉히며 잠을 잤다. 그게 또 못내 어여뻐서 카메라에 담았다.

 

 

 

 

 

 

배를 타러 가는 길의 풍경은 내가 알고 있는 형용사를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모르겠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코발트 색의 바다는 눈이 부시게 반짝였고 하늘은 눈이 시리게 파랬다. 날씨가 아주 맑은 날에만 볼 수 있다던 한라산도 보였다. 또또또 럭키. 비가 올까 우산을 챙겼던 우산을 양산 대용으로 썼다. 써야만 했다. 중간에 말을 만난 K씨는 스냅백을 삐뚤게 눌러 쓰고 아트혼을 발휘했으나 전봇대 그림자가 도와주지 않아 아쉬워했다. 항구로 걸어오며 우리 다음에 올 때는 면허를 따서 전기차든 바이크든 타자,고 했다.

 

 

엘님 덕에 예약한 저녁의 응? 식당이 우리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는데 버스를 기다리며 더위와 갈증을 참지 못하고 아아를 마셨다. 들어갔던 카페에는 일출봉을 형상화한 디저트가 있었는데 다음에 오면 저걸 먹자,는 다짐을 하게 할 만큼의 귀여운 비주얼이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상징적인 건물이 별로 없는 시골 길을 걸으며 도로명 주소로 바뀌고 집집마다 그 표기가 돼 있는 게 신의 한수,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번 여행에서 길을 찾는 데 무척 애를 먹었을 거다. 찾아간 곳엔 김태호 피디를 닮은 아저씨와 그를 솊,이라 부르는 아저씨가 있었고 심야식당처럼 U자 형의 테이블에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어떤 메뉴가 나올지 궁금해, 궁긍해, 하고 있었는데 새우와 홍합과 바지락이 올라간 카레 필라프 같은 것이 나와서 나는 조금 당황했다. 카레 별로란 말을 빼놨구나. 그래도 여타의 것들 때문에 카레의 향과 맛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아 못 먹을 정돈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가 오기 전에 이것저것을 먹은 데다 밥의 양이 정말이지 많아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으려 애쓰며 우리는 과연 음식이 이것이 다인 것인가, 이것을 다 먹어야 다음 음식이 나오는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 궁금해, 하다 결국 그 음식을 클리어하지 못하고 나왔다. 나름 특별한 경험을 한 것으로 만족하며 다음에 오게되면 고기와 해물 라면이 먹고 싶다고 정확한 메뉴를 말하자, 했다. 사진은 저녁을 먹은 곳과는 별 상관이 없는 카페인데 외관이 예뻐서 담아두었다.

 

숙소에 가서 씻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통유리로 밤바다를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가는 길엔 편의점이 없었고 숙소엔 믹스 커피가 없었다. 어제보단 일찍 도착한 덕인지 겸하고 있는 카페 불이 켜져 있길래 옳다구나, 하고 들어갔으나 이미 카페는 마감했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다/고 하니 커피는 그냥 주겠다고 했다. 또또또또 럭키. 어쩐지 따뜻한 게 아닌 아아를 마시게 된 게 조금 함정이었지만 어쨌든 커피를 마실 수 있어서 좋았다. 샤워실이 만원이라 기다리며 스텝 언니와 잠깐 얘길 나눴는데, 회사 그만두고 이곳에 온 지 3주 정도 됐고, 곧 서울에 갔다가 다시 내려와 이번엔 좀 더 교통이 좋은 곳의 게스트 하우스 스텝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도 회사를 그만뒀다고 하니, 용기 내서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며 적극 권장했다. 스텝 언니가 퇴근하고 우리는 한참이나 밤바다를 보며 음악을 듣다 잤다.

 

 

우린 괜찮은 여행 메이트였고, 돌아오며 다음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해보지 않은 여행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우린 이번 여행을 통해 여행이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길지 않은 여행이어도 지금 있는 곳을 떠나면 볼 수 있는 게 많아지고, 마음도 풍성해진다는 것 역시 알았다. 꽤나 좋은 처음,이었다.

 

 

(★ photo by K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