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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18-20_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러 갔던 부산과 경주

KNACKHEE 2018. 6. 29. 11:51

떠나기 직전 변경된 상황으로 이래저래 궁리를 하다 부산-경주-부산의 코스를 확정했다. 여행을 몇 번 해보지 않았지만, 겨우 그 몇 번의 여행을 통해 혼자 하는 여행은 취향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체류 일정도 하루 줄였다. 그냥 혼자 있을 거면 옆동네 호텔을 잡고 노는 게 훨씬 낫지. 나는 여행보다는 호텔을 좋아하는 것 같다. 교통편과 잘 곳, 가서 만날 사람만 정해놓고 그 외엔 아무 계획이 없었다. 해외도 아니고, 뭘 굳이. 해외를 갔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긴 하다.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기 직전 F팀 대리에게 전화가 왔다. 팀 외장하드의 행방을 물었고 둘 중 하나는 조닭이 가져가서 모른다고 했더니 조닭이 자기에게 없다고 했단다. 그럼 나는 정말 모르겠다고, 와인색 외장하드를 그 사람이 가져간 게 확실한데 본인이 아니라고 하면 나도 모르겠다고 했더니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어쩌란 건지. 그리고 퇴사 의사를 밝히고 한 달여의 시간이 있었는데 이런 저런 확인들을 왜 꼭 퇴사 후에 하는 건지도 의문이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양보를 하고 검색대를 빠져나와 탑승 시간 지연으로 복도를 서성이다 비행기에 올랐다.

 

부산에 가까워질 즈음 바다와 섬들이 내려다보였다. 물 위로 솟아 있는 면적은 아주 조금이었지만 물 밑에 분포돼 있는 면적이 넓었고 그 지형들은 아주 거대해 서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현종 시인의 시 <그 섬에 가고 싶다>가 떠올랐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우리는 모두 섬이라 외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심연에선 모두, 연결돼 있었다. 사실 우리는 드러내고 싶어 하는 부분 말고,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에선 본질적으로 모두 같은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부끄럽고 수치스럽지. 그래서 더 열심히 수면 위로 내보일 것을 고르느라 삶이 피곤해지는 건가 싶기도 하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광안리 해변을 벗삼아 오래된 얼굴을 기다렸다. 일렁이는 파도만큼 설레는 마음으로.

 

 

 

 

A 언니는 어머니가 추천해줬다며 태종대의 태종사를 목적지로 정했다. 수국이 피었을 거라며. 안타깝게도 우리의 방문은 수국의 개화보다 일주일을 앞서버렸고 두어 무리의 수국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뭘 보는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어. A 언니를 만났다는 게 중요하지.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본가가 있는 부산에 내려와 있는 언니는 한 달에 한 명씩 친구들이 다녀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아마 꽤 놀게 될 것 같으니 선선해지면 다시 오겠노라 약속을 남발했다. 태종대에선 길냥이들을 많이 만났고 내려오는 길에 본 바다는 수묵화 같았다.

 

대학에서 만난 A 언니와는 동기인 K와 같이 알던 사이였는데, K와 만나는 시간이 더 많았던 데다 K를 통해 A 언니를 알게 된 터라 막연히 A 언니보다 K와의 관계가 더 오래 지속될 거라고 생각했다. K 없이 A 언니와만 만나는 건 어색할 것 같기도 했고. 그런데 2년 전쯤 K와 A 언니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우리는 각자 보는 사이가 됐고 작년 K와 나의 관계가 끝나면서 내겐 A 언니와의 관계만 남게 됐다. 언니와 만나서 걷고 밥 먹고 음료를 마시는 내내, 정말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K의 이야기도 잠깐 나왔는데, 그냥 우리는 서로 삶이 힘들어질수록 에너지를 너무 많이 앗아가지 않는 관계들만 남겨놓게 된 게 아닐까, 하고 확신할 수 없는 결론을 내렸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알게 될까.

 

 

자정이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고 숨은 여행 메이트였던 슈키를 침대에 꺼내 놓았다. 캡슐 호텔은 처음이었는데, 1인실이라 그런지 기대보다 창의 크기가 작았고 침실 칸 전체의 도어락은 있었지만 개별 잠금장치 없이 커튼이 문 역할을 대신하는 건 좀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여성 전용 칸이었다지만, ... 샤워 부스는 허리를 숙여 머리를 감는 내 방식을 고수하기엔 너무 비좁았고 화장실은 앉으면 문에 무릎이 닿기 직전이었다.

 

 

둘째 날은 경주로 넘어가는 일정뿐이었기에 전날 미리 체크아웃을 2시간 연장해 추가 금액을 지불하고 잔뜩 늦장을 부렸다. 조그만 창으로 보이는 바다를 등지고 집에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을 기꺼이 했다. <지정 생존자>도 이어서 보고 애들 영상도 몇 개 보고. 그러고는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유서는 나의 가장 내밀한 고백이면서도 결국 내가 사라졌을 때 이 세상에 남은 사람들이 봐야 할 글이기에 마음처럼 쭉쭉 써내려 가기가 어려웠다. 내 감정뿐 아니라 사실 관계도 명확해야 하는 것이므로 자체 검열의 과정도 필요했다. 쓰다 보니 길어져서 다음에 이어 쓰기를 기약하고 짐가방을 쌌다.

 

그런데 시간 연장이 다음 타임 직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지 청소하시는 분께서 체크아웃 열한 시예요! 하고 소리를 지르셨고 잠시 후 직원이 와서 같은 말을 또 하기에 시간을 연장하고 금액도 이미 지불했다고 말했다. 느긋하자고 벌어 놓은 두 시간 동안 마음이 영 불편했다.

 

 

경주로 넘어가기까지 시간도 남았고 점심도 먹어야 해서 근처 카페를 찾았다. 호빵맨 설기가 덕후의 눈에 띈 건 운명이었고. 그래서 부산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Anpanman 들으며 호빵맨 설기 먹는 걸로 정하고는 아주 흡족해 했다. 설기가 혼자 먹기엔 양이 좀 많았는데, 케이크면 남겨도 크게 마음이 쓰이지 않았을 텐데 떡이라 괜히 마음이 불편해 최대한 먹으려 애를 썼다. 결국 볼따구 두 개 정도의 크기를 남겼지만, ... 난 최선을 다헀다.

 

 

 

경주로 넘어가는 버스 안에서 꿀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협회 가입자 금액이 안 맞는다고 F팀에서 난리가 났다며 확인해 줄 수 있겠느냐는 팀장의 연락이 와 있었다. 하. 이게 무슨. 지방에 내려와 있어서 목요일에나 확인이 가능할 것 같다고 했더니 답이 없었다. 이 부분이 제일 나쁘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기 수틀렸다고 답을 안 하는 건 뭐란 말인가. 그럼 목요일에 확인을 해 보라든지, 자기가 먼저 확인을 해 보겠다든지, 말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쩌란 건지. 찜찜한 기분으로 경주에 도착했으나 L언니와 먹은 피자며 당근 케이크가 맛있어서 금방 잊었다. 그리고 언니가 호오오텔을 잡아줬으니까! 호텔 좋아! 호텔 최고! 피자를 먹고 비를 피해 카페에 들어갔는데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우산을 사서 안압지에 갔다. 그래도 경주까지 왔으니까, 하고.

 

 

 

 

 

색색의 조명을 받은 첨성대는 괴기스러웠고 비 오는 밤의 안압지는 사람이 적어서 좋았다. 그리고 사실 나는 비를 좋아한다. 그리고 또. 옷이 젖어도 가서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잘 수 있는 호오오텔이 있으니까! 정말 너무 좋다 호텔. 낄낄.

 

 

경주의 숙소에서도 슈키를 꺼내놓았는데 드넓은 침대 위에 쟈근 슈키를 올려놓으니 아주 하찮고 귀여웠다. 언니랑은 나란히 누워 나아지지 않는 가계에 대해 이야기하다 스륵, 잠이 들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얘기가 섞여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무덤의 도시에서 맞이한 아침은 고요하고 한갓졌다. 한옥 스벅에서 아점을 먹고 오후에 면접이 있는 언니를 터미널에서 배웅했다. 다정한 언니는 경주에 나를 두고 가는 걸 못내 마음에 걸려 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옆동네 아트박스에서 눈독들였던 에코백을 경주 아트박스에서 충동구매하고 특별한 날에만 마시는 스벅의 자바칩 프라프치노를 사 들고 <여중생a>를 봤다. 후. 알겠고. 돌려 내, 내 현재희, ;_ ; 영화 정말 어떡하지.

 

 

황리단길에서 가보고 싶었던 곳은 어서어서,가 전부였는데 들어가자마자 여러 작가님들의 초단편 소설을 모아 놓은 『이해 없이 당분간』에 꽂혀 책장에서 책을 집어들고 혼자 설렜다. 제목도, 문고판의 사이즈도, 민트색 표지도 무엇보다 김금희 작가님의 작품이 수록됐다는 것도,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설렘의 요소였다. 계산을 할 때 주인분께서 이름을 물어보시고는 책 처방 봉투에 이름을 적어 주셨다. 내가 나에게 하는 책 처방이라니. 썩 마음에 들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시간을 앞당겨 근사한 저녁 하늘과 마주하며 일상의 자리로 돌아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