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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까도 내가 까지

KNACKHEE 2022. 1. 8. 20:33

요즘에는 파인아트가 아님에도 뮤지엄 텍스트를 획득한 작가들의 공통 분모를 찾아내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다. 뮤지엄은 어떤 기준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아카이빙 자료에 수록될 만하다고 판단한 걸까. 기성 문법과 다른 것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기존 주류를 옛것으로 만드는 새로운 주류가 됐을까. 어떻게 해야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예술성과 시장성을 입증하고 작품 활동을 지속해나갈 수 있을까.
로이 리히텐슈타인 전시에서 눈에 띈 건 레오 카스텔리라는 이름이었다. 수업 시간에 대단한 갤러리스트였다고 언급됐었지만 당시에는 당면한 과제들을 쳐내기도 버거워서 파고드는 일을 미뤄뒀던 인물이었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이름을 다시 만나니 내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답이 그에게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집에 가는 길에 관련된 책을 주문했다.
전시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순수미술을 베이스로 갖고 있으며 당시 주류였던 추상미술에 도전했다 소리 소문 없이 망한 흑역사가 있고, 벤다이 점 기범의 형태적 변주와 작품 주제의 다양화를 끊임없이 꾀했다는 점이었다. 지식 없는 어쭙잖은 속단이겠지만 어쩌면,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해나가는 태도가 예술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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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보고는 대학원 동기 분들과 밥도 먹고 차도 마셨는데, 저번에 내 속을 긁었던 분이 다시 일을 시작했고 서울역 쪽으로 출퇴근을 한다는 말에 또 속을 박박 긁었다. 빨리 서울로 올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냐며, 매일 네 시간씩 길바닥에 시간을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아니, 나도 그거 고민이긴 한데, 내 인생 까도 내가 까지. 좀 욱해서 "버리는 건 아니죠. 그 시간에 저는 할 일을 하는데!" 하고 받아쳤다. 짱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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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전시를 보다가 미국에서는 앤디 워홀보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업을 더 높이 쳐주는데, 워홀이 레디메이드를 작품에 그대로 사용했다면 리히텐슈타인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해 표현해냈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주워들었다.

사위가 어둑해진 쌀쌀한 겨울 저녁, 지도 앱을 켜고 초행길을 걸었다.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것이어야 할 텐데,...' 하는 걱정 때문이었을까. 인파로 붐비지 않는 곳에서 높은 온도의 빛을 내고 있던 갤러리가 꼭 쉘터shelter같이 느껴졌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연작 앞에서는 허리를 조금 굽히고 눈을 가늘게 떠 가장 표면의 레이어 안쪽에 겹겹이 펼쳐진 과정들을 살폈다. 물감과 레진을 반복적으로 쌓아올린 작품들은 앨리스라는 인물이 놓인 공간과 심리의 연대기적 구성으로 읽히기도, 앨리스가 만난 사건들의 액자식 구성으로 읽히기도 했다.
2층을 비스듬한 각도로 올라가다 보면 가장 먼저 무언가를 보고 말을 잇지 못하 듯한 표정의 앨리스를 보게 된다. 아주 비밀스러운 얘길 의도치 않게 엿듣거나 보게 된 듯 하지만 사실 그 당사자들에겐 별것 아닌 가벼운 일일 것 같아서. 그래서 작품에 담긴 저 장면이 조금은 시트콤스러워 묘하게 웃기고 귀여웠다.
갤러리스트 P는 작품 속 앨리스가 그 고유명사가 지니는 보편성을 빌려 오기는 했지만 인종, 나이, 현실성 등을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않았기에 보는 이의 확장된 해석이 가능하다고 귀띔해줬다. 여러 질문에 답과 함께 또 다른 질문을 덧붙여준 P 덕분에 한 번 보고 지나갔을 작품을 두 번, 세 번 보게 됐다.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으면 언제나 보이지 않던 세계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휴. 갤러리스트 P 정말 K아트의 미래시고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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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들과 헤어진 후에는 이번 학기 수업 때 여차저차 안면을 트게 된 P님의 일터로 질척이러 길을 나섰다. 사실 첫 학기 때부터 나랑 관심사도 비슷하신 것 같고 또 얼빠의 시각을 자극하는 분이시기도 해서, ... 정말 너무 친해지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다가 이렇게! 전시 설명도 듣고 사진도 찍히고 다음을 기약하기도 했다. 오늘 나 쫌 성공한 덕후였네.

그런데 서울숲, 압구정 진짜 너무 멀지, ... 인천러는 사실 서울 어딜 가든 기본 2시간이라 좀 거리 있네, 해도 그냥저냥 다니는데 편도 3시간 짜리를 꾸역꾸역 간다? 그건 진짜 참트루럽인 거라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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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치열함에 대해서 또 생각을 해봤는데. 지난번에 대표님과 저녁을 먹다 짧게 끊긴 이력들이 마이너스로 작용하진 않았는지 물었었다. 그는 전통적인 기업에서는 그런 시각이 보편적일 수 있겠지만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무엇보다 회사는 개인의 인생을 책임져줄 수 없기에 그런 선택들을 평가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답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시니 다행이라고 말하면서 나도 모르게 사실 좀 억울하다, 고 덧붙였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아닌데, 싶어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치열했던 적은 없을지 몰라도 해야 하는 일들에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치열했다. 그건 확신할 수 있겠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