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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김 없이 다정하고 움츠러듦 없이 쾌활한 느낌의 나라

KNACKHEE 2024. 6. 12. 23:17

두 시간이면 통근 편도랑 비슷하잖아, 하고 가뿐하게 떠난 대만 여행_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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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인 여행 마지막 날의 첫 번째 일정은 약국에서 다래끼 약을 사는 것이었다. 몇 년 전의 동유럽 여행에서 다래끼가 난 이후로 종종 다래끼가 나서 째보기도 하고 먹는 약이나 눈에 넣는 물약을 써보기도 했는데 바르는 연고를 처방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반신반의했는데 증세가 금세 호전돼서 감탄했다. 할머니 약사님 채고시다. 약국을 나와서는 카페에 앉아 시집을 읽다가 앱으로 '[여행은 명상] 낯선 곳에서 커피 한잔' 테마의 짧은 명상을 했다. 여행은 일상에서 물리적, 마음적 거리를 두고 왜 그렇게 별일 아닌 것에 종종거렸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기에 여행지에서의 커피가 생각보다 맛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내가 오늘 지금 여기에서 나의 일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국경절이라 꼭 가고 싶었던 갤러리가 문을 열지 않아서 조금 상심했는데 덕분에 모두 괜찮아졌다. 그리고 오늘의 아쉬움은 내일의 의지意志가 될 테다.

카페는 일본 분이 하시는 곳이었다. 1층에는 바 테이블과 작은 테이블 몇 개가 있었고, 2층에도 작은 테이블이 몇몇 놓여 있었다. 디저트 메뉴가 많아서 고민하다가 기분이 좋아진다는 어원을 가진 티라미수와 평소 잘 만나기 어려운 카눌레에 언제나 그렇듯 카푸치노를 곁들였다. 커피와 티라미수가 먼저 나오길래 카눌레는 해동 중인가 했는데, 너무 늦어져 혹시나 하고 여쭈니 당황하며 스미마셍! 하셨다. 그렇지만 노 프라블럼이지. 일본에서 지내는 일본인 분들이 자주 찾는 곳인 것 같았고, 일본인 관광객 분들도 오셔서 사장님과 고향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렸다. 육호수 시인의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 2부의 〈해변의 커튼콜〉을 여러 번 읽었다. 파도는 내가 버린 얼굴들이었으므로 나의 해변은 항상 모래성보다 먼저 폐허였다,에 1차로, 두 마리의 물고기에 일흔 명을 일곱 번씩 등 성경적 함의들에 2차로, 커튼콜이라는 단어에 3차로 감탄하면서. 여기에도 기록해두고 아무 때나 꺼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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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점 없는 십자가를 왜 바다에 던지나 // 먹다 만 빵을 바다에 던지면 새들이 뛰어들어 헤엄쳤다 / 부끄럼도 없이 / 아름답게 // ​​파도는 내가 버린 얼굴들이었으므로 / 나의 해변은 항상 모래성보다 먼저 폐허였다 / 알아들을 수 없는 농담처럼 / 내게 맞지 않는 신발들만 밀려왔다 // ​​썰물, 모래 위엔 두 마리의 물고기 / 젖은 이불을 덮어주면 끝없이 불어나며 파닥였다 / 집에 돌아와도 파닥파닥, 끝나지 않는 커튼콜 // ​​짠바람 먹은 베개 밑에 칼을 묻고 / 어떤 아이도 배지 않는 이불을 덮었다 / 잠을 깨지 않는 얼굴들 일흔 명을 일곱 번씩 / 집에서 몰아냈다 / 일흔 번째, 일흔의 일흔 번째에도 파도가 왔다 // ​​그러다 내가 먼저 잠이 드는 날이면 / 모르는 사람 잠에서 깨어 해변에 나무를 심었다 / 잠든 내 머리를 빗기면 / 조용히 나무가 자라고 / 나무에 새긴 이름들 / 산모의 튼 살처럼 갈라질 때까지도 / 짝짝짝 끝나지 않는 // 커튼콜; 신이 떠날 때 우리에게 그림자라는 뿔이 돋아났다 // ​나를 집어 바다에 던지면 검은 개들이 따라 뛰어들었다 / 용서도 없이 / 아름답게 // ​​바다 위 부표를 볼 때면 젖니가 흔들렸다 / 구름은 바다의 끝자리에서 뛰어내려 선분이 되었다 / 멀어지는 뒤통수처럼 하늘이 돌아눕고 있었다 // ​​커튼콜, 내가 살아난 이유를 오래 설명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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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맵에서는 대충 태극당미술관,으로 표기되고 애써 찾아보면 타이베이 현대미술관으로 나오는 곳의 메인 전시 <Signal Z>는 Z세대가 바라본 오늘날에 대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기술 사회에 대한 시사점 등이 유쾌하고 키치하게 담겨 있어 즐거웠다.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도 많았고 아이패드 드로잉을 물성이 있는 액자나 캔버스 등에 옮겨오지 않고 디지털 화면 그대로 보여준 것도 인상적이었다. 전시장 곳곳에 전시된 vision 404가 특히 흥미로웠는데 작품 영상에 등장하는 큐레이터님의 부탁으로 관람객과 사진을 찍어드리는 경험도 했다. 한국인 답게 왕자 포즈 해가며 열심히 찍었지.

 

 

독립서점인 PonDing에는 살펴보고 싶은 책들이 많았고 <매거진 B>, 이영채 작가님의 포스터, 타바코 작가님의 출판물 등 우리나라의 독립출판물과 매거진도 만날 수 있었다. 먼저 살펴보기를 끝낸 G가 근처에 보고 싶은 데가 있다며 빙수 가게에서 만나자고 하면서 얼마나 더 볼 거냐고 묻는데 너무 쪼이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상했다. 패키지도 아니고. 알 수 없고 서로 보고 싶은 게 다르니 미라마 관람차에서 저녁에 바로 만나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일정을 나눴다. 이후로 마음 편히 천천히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다닐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아무래도 앞으로 먼저 이 친구에게 여행을 제안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지난 동유럽 여행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고는 다시 여행을 계획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정말 이거야말로 알 수 없는 일이지.

 

 

다통대학은 이국적이었다. 메인 건물은 중세 서양식에 조경은 열대의 그것. 학교 앞의 서브웨이에는 은우가 모델인 포스터가 있었고 로티세리 치킨이 없어서 로스트 닭가슴살을 먹었다. 탄산 외에 사과 주스 등의 선택지가 있었던 게 인상적이었고 쿠키도 훨씬 기름지지 않았다. 우리나라 쿠키는 종이에 배어 나올 정도로 기름진데.

 

 

근처에 있는 갤러리를 찾아갔으나 국경일이라 휴무였다. 인서타에 고지도 안 해주고 흑흑. 갤러리 양옆이 세차장과 편의점인 것이 특이했다.

 

 

just not library에 가려는데 G에게서 딤딤섬에 가자는 연락이 와 있었다. 내가 있는 곳에 하나 앞으로 가려던 곳에 하나가 있어서 G에게 보이스톡을 해 어디를 염두에 두었는지 물었다. 전자이지만 방금 망고 빙수를 먹어서 바로 먹기는 어렵단 말에 나도 그런 상태니 그럼 관람차를 좀 당겨서 타자고 제안해 7시 일정을 4시 30분으로 당겼다. G는 1시간, 나는 30분이 걸려 근처의 성품서점을 둘러볼 여백이 생겼다. 그런데 G도 일찍 도착해 바로 마주쳤다는 게 함정.

 

 

성품서점의 전면 메인 매대에 일론 머스크 이슈의 잡지와 도서들이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어떤 방향으로 다루고 있는 걸까. 해리포터 에디션들과 일본 도서도 많았다. 관람차 자체를 타는 게 처음이었는데 서로 티키타카가 잘 되는 사람끼리 타면 관람차가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오는 동안 차분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다 싶었다.

 

 

옆 건물인 NOKE에서는 1층 로비와 츠타야 서점에서 각각 다른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로비에서 전시 중인 Lucas Zanotto를 우리 아티스트로 데려오고 싶다는 마음과 우리 아티스트들의 전시를 이곳에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컨택이라도 해볼까 싶고. 츠타야 서점은 언어의 한계 때문에 이곳의 강점이라는 큐레이션을 살펴보기는 무리였고, 작게 전시 중인 작품을 통해 타쿠 반나이의 작품이 이 서점 안에서 어떤 모양새로 전시되었을지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교보의 핫트랙스처럼 이런저런 문구나 생활용품, 아트 상품 브랜드가 입점되어 있었는데 퀄리티가 좋아서 이런 부분에서의 큐레이션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네 싶었다. 2층으로 이어지는 넓은 계단 공간과 통창에는 21일부터 화이트스톤 갤러리에서 시작되는 영국 작가 필립 콜버트의 작품 일부가 놓여 있고 시트 디자인도 되어 있었다. 대만 재밌네, 진짜.

 

 

역 안에 있는 딤딤섬은 약간의 웨이팅 후에 들어갈 수 있었고 신메뉴라고 주문한 치즈미트볼 같은 것에 고수가 박혀 있어서 상큼한 맛이 났다. 고수가 이런 식으로 쓰이니 좋네. 배를 남겨두고 미스터 도넛도 하나 먹었지. G는 혼자 있으면 심심하기 때문에 여행을 같이 하는 게 좋다고 했는데 어차피 생각이나 감상 공유도 잘 안 해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사실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차피 말도 잘 안 하잖아, 하고 되물었더니 좋다, 라고 했을 때 그러게, 하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 이상이 필요한데. 아쉽네. 생각과 감상을 말해주는 데 어려움이 없는 사람과 여행해보고 싶다. 그리고 자기가 같이 있는 사람에게 뭐든 맞추는 편이라고 자꾸 말하는데 표정 관리 못할 거면 그런 말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 계속 여기서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뭘 필수로 사고 먹는지, 어딜 가는지 찾느라 핸드폰만 들여다 보고 있는 것도 마음을 부대끼게 했다. 언제나 제일 효율적인 루트만 찾고 목적지를 정하고 나면 주변 안 돌아보고 빨리 걷기만 하는 것도. 우리의 여행 스타일이 정말 안 맞는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같이 느긋하고 비효율적으로 걸어줄 여행 메이트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 앞서가다 멀뚱한 눈으로 기다리는 사람 말고. 업무 외의 것에서는 무엇이든 조급해지고 싶지 않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중산역 근처의 성품서점을 들러 문구며 책을 또 구경했다. 대만은 케이팝이고 뭐고 그냥 일본 문화가 짱먹은 듯.

 

 

동선 중에 서너 곳이 있었음에도 어쩐지 가지 못했던 KAFFA 커피 지점이 공항에도 있어서 마실 수 있었다. 컵이 정말 예뻐서 감탄하며 감동했다. 버리기 아까웠지만 버렸지 뭐. 어쩌겠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면서는 대만이 공심채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습도에 절여져 있지만 풍성한 초록들과 아삭한 문화 요소들로 풍미를 더해주는. 이번에 경험한 대만은 숨김 없이 다정하고 움츠러듦 없이 쾌활한 느낌의 나라였다. 또 이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건 세상의 흐름을 좇아가야 한다는, 무엇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조급함과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거였다. 여행이야말로 지금 여기, 와 가장 닮아 있는 행위인 것 같다. 언젠가 다시 와서 대만의 풍미를 또 만끽해야지. 일러스트레이션이 리터럴리 도시 곳곳에 있어서 눈과 기분이 자주 즐거웠던 것도 좋았다. 엄마랑 올 수 있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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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