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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 Bossanova,

어딜 가나 문제인 건 마찬가지라 이왕이면 멀리 떠난, 뜨거운 생활 in 제주_01 _ 3년 만이었다. '뜨거운 생활'이란 이름으로 독서모임을 빙자한 잡담회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그리고 같은 학교, 같은 과 동기로 만난 지 10년 만에 우리는 셋이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다. 작년 초에 내가 발제 주제로 '잘츠부르크'를 정하면서 기간을 정하고 돈을 모아 잘츠에 가자! 했으나 어쩐지 요원해졌고 일단은 국내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으로 가자, 하고 각자 이틀의 연차를 받았다. 그 사이 회사 업무로 제주도에 사는 저자와 계약을 진행할 일이 생겼고, 이왕이면 만나서 하면 좋으니까 상사에게 연차 동안 마침 제주도에 가게 되었으니 잠깐 만나고 올 수도 있겠다는 뉘앙스로 말을 흘렸다. 솔직히 다른 방법을 찾아주..

K언니를 만난 건 스무 살 때다. 교회에서 여러 교회가 모이는 비전 캠프에 갔었고 거기서 언니와 같은 조가 됐다. 언니는 예쁘고 착하고 야무졌다. 나는 언니와 친해지고 싶었고 계속해서 질척였다. 이후에는 언니가 방학 때 서울에 올라와 나에게 시간을 내어줬다. 나는 매번 말로만 이번엔 제가 갈게요! 하다가 구 년 만에야 언니를 만나러 광주에 갔다. 신혼집은 넓고 깔끔하고 아늑했다. 언니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음식을 준비했고 나는 철없이 앉아서 받아먹기만 했다.학교 생활에 대해 얘기할 때면 즐거워하던 언니가 올해는 조금 지쳐보였다. 선생님의 권한이 자꾸만 축소되는 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마음이 어렵다고 했다. 언니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인권이라는 말로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 것인지 어지러워졌..
전국 친구 투어,로 명명하고 보니 이번이 올해의 두 번째였다. 처음은 지난 봄에 갔던 포항. 그리고 이번엔 부산과 세종. 내려가는 날이 마침 수능이라서 딱 10년 전의 오늘과 그때에서 지금까지 이어진 선들을 곱씹어봤다. 수능은 인생에 검지발톱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다다랐다. 그 정도의 일이었다. 함께 부산현대미술관에 가기로 했던 A언니가 갑자기 탈이 나는 바람에 미술관은 혼자 다녀오고 언니가 좀 괜찮아지면 저녁에 밥이나 같이 먹기로 했다. 아, 이동하기 전에 숙소에 들러 짐을 놓고 나왔는데 침대 헤드에 쿠션이 달려 있어서 친구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저것의 용도가 무엇이냐며, ... 하핫. 기존의 우리와 새로운 우리. 멈춰서 서로의 몸짓을 듣지 않으면 우리는 붕괴되겠지. 서로의 무게..
포항에 가기로 했다. G언니를 만나는 것 외엔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거면 충분하지._ 포항으로 가는 KTX에서는 물음표와 마주했다. 대학원을 가긴 가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준비하고 있는 과가 맞는지에 대한 물음표가 시작부터 생기더니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일단은 멈춰야 할 시점인 것 같다. 호접지몽. 생각지 못한 근사한 바다를 만났다. 하늘과 땅과 빛바랜 문명이 모두 맞닿아 있었다. 여행에서 혼자 쓰는 숙소는 잠시 온전한 혼자만의 공간을 가져보는 경험을 하게 했다. 사실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왜인지 숙소에 신약성경이 있기에 펼쳤다가 마태복음 12장 말씀을 읽었다. 몇몇 구절을 기록해 둔다. 20절 /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몇 ..
억지로 선보러 나갔는데 이상형을 만난 기분이 이런 걸까 싶은 울산 출장기 울산은 처음이었다. 퇴사를 앞두고 출장으로 울산에 갔다.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광명역에서 KTX를 타니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짜둔 경로가 없어서 매체 특성상 중심이 돼야 할 외솔 기념관을 중심으로 방문지를 정했다._ 역에서 외솔 기념관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종점에서 내려 낯선 동네를 산책하는 기분으로 지도를 보며 걸었다. 매거진들의 동네 특집,에서나 볼 법한 풍경들이 펼쳐져서 취재와는 상관 없는 풍경들을 잔뜩 카메라에 담았다. 그런데 자꾸 동네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라 '이 길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초행길은 늘 의심 가득한 얼굴로 지나게 된다. 길에 사람도 없어서 물어볼 수도 없고. 일단 가는 수..
십 년 차 친구 이 센세와 떠나는 첫 해외여행, 다카마쓰_03 아침엔 눈이 왔다._ 공항행 리무진 버스에 타 핸드폰을 켰는데 갑자기 화면이 보라색 톤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니를 쓰고 있는 터라 "왜 그래, 너네 나라잖아!" 했더니 센세가 "고국을 떠나야 하니까 슬퍼서 그렇지." 하고 받아줬다.공항엔 커플이 많았다. 센세가 나더러 다음 여행은 남자친구랑 오라기에 아니 뭘 좀 데려다주고 그런 말을 해야 할 거 아니냐고 답했다. 어떤 타입이 좋은지 묻길래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센세가 "걔네 다 빼고, 내가 들어 본 이름 다 빼고." 하며 선수를 쳤다. "그런 애들은 현실에 없잖아! 있으면 내가 가졌지." "어차피 그런 스타일 안 좋아하잖아!" ",... 다다익선?" "오?" 매일 타들어 가는 느낌으로 나를..
십 년 차 친구 이 센세와 떠나는 첫 해외여행, 다카마쓰_02 전날 협의한 대로, 먼저 일어난 센세는 한 시간 일찍 공원으로 출발했다. 혹여 내 의지가 바뀌었을까 해서 같이 나갈 것인지를 묻는 센세에게 이불 속에서 손을 흔들었다._ 센세가 나가고도 좀 더 이불 안에 있다가 느긋하게 준비를 하고 잠깐 QT 책도 펼쳤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이었고 본문 해설 중 '자발적인 사랑의 의무'란 표현을 곱씹었다. 타인을 위해 더 유익한 방식으로 내게 주어진 자유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또한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말씀이 엄격한 율법의 지킴이 아니라 타인의 상황을 배려하라는 맥락에서 등장한다는 것에 놀랐다. 말씀을 조각조각 아는 건 위험하다. 등교, 출근 시간대에 거리로 나가니 다양한 연령의 ..

십 년 차 친구 이 센세와 떠나는 첫 해외여행, 다카마쓰_01 출국 이틀 전에서야 모네의 그림이 있는 나오시마 섬의 지추미술관이 휴관이란 사실을 알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하고 있던 부분이 뒤틀려 당황했다._ 다카마쓰 근처 다른 섬들의 정보를 기웃거려 보기도 했지만 딱히 끌리는 곳이 없었다. 1월에 휴관인 지추-이우환 미술관이 클래식한 미술관이라면 휴관이 아닌 베네쎄 뮤지엄, 집 프로젝트 등은 현대 미술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인 것 같았다. 후기가 나쁘지 않아서 일단 가 보기로.대학교 입학 전 예비 대학에서 만나 여태 친구로 지내는 이 센세와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이기도 하고 둘 다 시간을 많이 내기도 어려워 '일본'을 큰 틀로 두고 세부 목적지를 정했다. 센세가 일본의 소도시를 가고 싶다며 항공권 ..
아홉수를 앞두고 백수가 돼 떠나는 동유럽 여행_14_EPILOGUE 이른 두 시. 구체적인 장면은 기억나지 않지만 악몽을 꾸다 잠에서 깼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을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에 살짝 불안해했더니 이렇게나 바로._ 이래선 달라질 수 없다. 한 시간 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두 손을 모았다. 나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믿음을 구했다.눈을 뜨기가 불편하다 싶었는데 거울을 보니 왼쪽 눈에 다래끼가 나서 점막 안쪽부터 부어올랐다. 돌아가는 날이라 다행이지 싶으면서도 나는 걱정쟁이이고 아무래도 눈이라 조금 걱정이 됐다. 사실 많이.부다페스트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며 여행지에서의 마지막이 될 QT를 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붙은 제목은 '영적으로 자라가라'. 정말이지 자라고 ..
아홉수를 앞두고 백수가 돼 떠나는 동유럽 여행_13 중앙시장에 다시 방문했다. 어제 봐둔 원석 팔찌로 G와 이번 여행의 우정 아이템을 맞춰볼 심산이었는데, 결과는 대실패였다._ 어제 얼핏 봤을 땐 반짝반짝 빛이 났는데 막상 사려고 보니 썩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지하에 있는 마트에서 초콜릿만 잔뜩 샀네. 계획했던 소비가 아니라 봉투를 가져가지 않았고 또 사기도 애매해서 마트 전단으로 고기 싸듯 초콜릿들을 감쌌다. 그러고는 다시 중앙시장 이 층을 돌아다니다가 동생에게 줄 작은 유리컵을 하나 샀는데, 사장님이 네 손에 든 게 크니까 이렇게 하면 더 좋을 것 같아, 라며 초콜릿이 들어갈 만큼의 큰 봉투에 유리컵을 담아줬다. 아름다운 세상.숙소로 가는 길에 조심스레 G에게 어제의 팔찌 구매를 고백하며 한번 가..
아홉수를 앞두고 백수가 돼 떠나는 동유럽 여행_12 뜻밖의 기쁨. 내게 헝가리는 그런 곳이었다. 앞의 두 나라와 달리 아무 정보도 없이 발을 들였고, 발을 동동 구르며 지갑을 열었다._ 맥모닝을 먹으러 맥도날드에 갔는데 영어 메뉴판이 없었다. 그림을 짚어가며 주문을 할 요량으로 카운터에 갔는데 '+200Ft' 파트에 있는 음료, 해시브라운 등이 세트로 추가되는 게 아니라 각각 200포린트를 내고 추가해야 한다고 해서 일단 후퇴했다. 유로보다 커진 화폐 단위에 잠시 주저했는데 먹고 싶은 걸 다 시켜도 우리나라 돈으로 삼천 원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깨닫고 다시 주문 줄에 합류했다. 중앙시장은 숙소에서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거리였고 오늘도 어김없이 날이 좋았다. 여행의 팔 할은 날씨라던데. 럭키! 일 층엔 ..
아홉수를 앞두고 백수가 돼 떠나는 동유럽 여행_11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04장 23절)_ 이번 주일에도 유튜브로 수영로 교회 예배 영상을 봤다. 목사님은 지난 주일과 같은 로마서 본문으로 '마음의 중요성'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 마음이 무너지면 삶이 무너진다. 상황이 변해도 마음이 그대로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마음이 무너져 삶이 불행하게 느껴지는 건 마음을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웠기 때문이다. 이 상태를 지속하면 '나'라는 신을 숭배하게 된다. 이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기만 하는 것으론 해결되지 않는다. '주인'의 자리에 모셔야 한다. 그리고 내 행함만으론 마음을 바꿀 수 없다. 내가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유일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