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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 Bossanova,
산책하다 보면 마음을 잡아끄는 작은 풍경들에 자꾸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길이 있는데, 이 책이 꼭 그랬다. 읽다 멈추기를 반복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미 인쇄된 활자 위에 자판으로 쳐낸 글자가 새로 입혀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이 책이 지금 나의 마음으로, 세밀하게 읽혔다. 63페이지를 읽으면서 좋아만 하고 평가하지 않는단 문장을 곱씹었다. 그거야말로 완전한 좋아함,이지 않을까. 좋아함이란 취향의 문제라 늘 선택과 판단을 동반하는데, 이를 모두 제외한 좋아함이라면 실은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 상태처럼 보이기도 하는 거지. _ "린치는 달라. 린치는 감히 장악할 수 없는 세계니까 나는 좋아만 하고 그것에 대해서 평가는 안해. 린치를 좋아하는 건 때론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야." _ p..
떠나기 직전 변경된 상황으로 이래저래 궁리를 하다 부산-경주-부산의 코스를 확정했다. 여행을 몇 번 해보지 않았지만, 겨우 그 몇 번의 여행을 통해 혼자 하는 여행은 취향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체류 일정도 하루 줄였다. 그냥 혼자 있을 거면 옆동네 호텔을 잡고 노는 게 훨씬 낫지. 나는 여행보다는 호텔을 좋아하는 것 같다. 교통편과 잘 곳, 가서 만날 사람만 정해놓고 그 외엔 아무 계획이 없었다. 해외도 아니고, 뭘 굳이. 해외를 갔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긴 하다.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기 직전 F팀 대리에게 전화가 왔다. 팀 외장하드의 행방을 물었고 둘 중 하나는 조닭이 가져가서 모른다고 했더니 조닭이 자기에게 없다고 했단다. 그럼 나는 정말 모르겠다고, 와인색 외장하드를 그 사람이 가져간 게..
It Doesn't Matter 마음이 몇 갈래로 나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가장 꺼내놓고 싶은 마음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영화 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 같은 커다란 눈망울에 앙 다문 입술을 기본 값으로 가진 남자 아이 ‘코너 오말리’에 대한 이야기다. 코너는 ‘악몽’을 앓는다. 불치병에 걸린 엄마의 증세가 나빠질수록 악몽의 정도도 악화된다. 악몽엔 나무 괴물이 등장한다. 집 근처 언덕에 있는 주목은 매일 같은 시각에 찾아와 자신이 오랜 세월을 견디며 본 인간의 양가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난 널 낫게 해 주려고 왔어”라며.나무 괴물은 이야기를 해 주는 데에 조건을 단다. 한 번에 하나의 이야기를 해 줄 것이며, 세 개의 이야기가 끝난 후 네 번째 만남에선 자신의 이야기..
어쩌면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지도 모른다. 여행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경험이 손에 꼽을 만큼이라 절대적인 수치의 부족으로 이를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아직까지는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다. 하지만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건 '여행'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일상'을 벗어나고 싶기 때문일 테다. 일상의 자리만 아니면 이불 속이라도 상관 없다. 다만 여전히 곁에 가족이 있는 이불 속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값을 지불해야 하는 이불 속을 찾아야만 하는 거다. 여행 내내 회사 동료들과 가족의 연락이 왔는데, 회사 동료들의 연락보다도 가족의 연락이 더 참을 수 없었다. 일상의 자리와의 연결고리를 잠시라도 끊어내고 싶은 마음을 왜 몰라줄까 싶은 생각이 가족의 연락에서만 들었다. 요즘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게 가족..
내 대학 생활의 팔할을 차지하는 센세와 /가자, 가자, 가자/ 끝에 드디어 표를 끊고 KTX에 탑승했다. 대만일 뻔 했다가 부산으로 바뀐 여행지였지만 사실 어딜 가는지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진부한 표현이겠지만, 센세랑 간다는 자체가 중요했고 어디든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생각해 보니 부산 여행이 처음이기도 했다. 모든 게 적절했다. 이 센세는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밀린 생활 기록부를 썼다. 그 동안 나는 뭘 했더라. 기억이 잘 안 난다. 아마 센세의 집중을 방해하다가 조금 졸기도 하다가 간혹 깨서 음악을 듣기도 하다가 가져온 책을 의무감에 몇 줄 읽기도 했을 테다. 부산에서 먹은 첫끼는 돈가스.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돈가스. 내가 초딩 입맛이기도 하고 둘 다 맛집을 찾아..
누구의 시작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우리는 3월이 가기 전에 분기모임을 해야 했고, 그렇다면 이번엔 여행을 갈까? 했다. 2박 3일, 1박 2일, 그렇다면 월차 등등 의견이 분분하다가 공휴일을 껴서 1박 3일의 여행을 하기로 했다. 이때만 해도 백수 둘이 여행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 어째서인지 여행지는 여수와 순천으로 좁혀졌고, 지금 시기엔 순천이 여수보다 볼 게 많을 것 같다는 주변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 여수로 결정했다. 셋 다 엄청 추진력이 좋고 계획적인 타입이 아니라 일은 조금씩 진행됐다. 우린 코레일 아이디가 없어!라는 말에 일전에 전주 여행을 위해 가입해뒀던 게 생각나서 가는 기차편을 예매하고, 돌아오는 건 버스를 탈까 하다가 셋 다 고터보다 용산이 집에서 가까워 돌아오는 기차편을 추가..
주변의 공기가 묘하게 들떠 있었다. 나는 그걸 감지하지 못했는데 엄마가 /너 지금 여행 간다고 신 나서 나한테 서비스 하는 거지?/라고 해서 알았다. 친구와 단둘이 가는 여행도 처음이거니와 이렇게 주도적으로 비행기를 예약하고 방을 잡고 하는 것도 처음이라 그렇다. 같이 스틴트를 준비하던 팀원들은 모두 갔는데 나만 가지 못해서. 머리로는 다른 뜻과 인도하심이 있겠지, 하며 받아들였지만 속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서 어디든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마침 K가 함께 가 준대고. 가자, 하곤 바로 그 주에 만나서 계획을 짜고 그 다음 주에 진짜 떠났다, 우린. 맙소사. 사실 K와는 알고 지내는 내내 어딘가에 /가자/고 말은 무수히 많이 주고받았었는데 정말 이렇게 떠난 건 처음이라 얼떨떨한 기분이기도 했다..